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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장훈

뚜스따스 2019. 11. 12. 2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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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대 거인 ! 서장훈에 대해 준비해 보았습니다. 농수선수 시절부터 방송인까지! 다양한 면에서 정말 열심히 살고 있는 서장훈에 대해 알아보려고 합니다. 일단 서장훈 하면 가장먼저 생각나는것이 아는형님 인데요, 아는형님에서 특별히 서장훈의 면모를 잘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그럼 서장훈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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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서장훈 (徐章勳/ Seo Jang hoon, Seo Janghun)

출생

1974년 6월 3일 (45세), 서울특별시 강남구

본관

달성 서씨

신체

207cm, 110kg, 320mm

가족

아버지 서기춘, 어머니 김정희, 여동생

종교

개신교

학력

연세대학교 사회체육학 학사

소속사

미스틱스토리

포지션

센터

등번호

55, 7, 11

소속팀

청주/서울 SK 나이츠(1998~2002) 

서울 삼성 썬더스(2002~2007) 

전주 KCC 이지스(2007~2008) 

인천 전자랜드 블랙슬래머/엘리펀츠(2008~2011) 

창원 LG 세이커스(2011~2012) 

부산 kt 소닉붐(2012~2013)

국가대표팀

FIBA 세계선수권 2회 (1994,1998) 

아시안게임 4회 (1994,1998,2002,2006) 

FIBA 아시아선수권 5회 (1993, 1997~2001, 2005)

 

 

수상내역

농구대잔치 MVP 3회(94, 97, 98) 

농구대잔치 베스트 5 4회 (94, 95, 97, 98) 

농구대잔치 우승 3회 (94, 97, 98) 

KBL 파이널 우승 2회(2000, 2006) 

KBL 정규리그 MVP 2회(2000, 2006) 

KBL 파이널 MVP 1회(2000) 

KBL 베스트 5 8회(1999, 2000, 2002~2006, 2008) 

KBL 올스타전 MVP 1회(2006) 

KBL 리바운드상 1회(1999) 

1994 히로시마 아시안 게임 은메달 

1998 방콕 아시안 게임 은메달 

2002 부산 아시안 게임 금메달 

ABC 선수권 대회 우승 1회 (1997) 

/ 준우승 1회 (1999) / 3위 2회 (1993, 2001) 

1994년 백상체육대상 남자 우수신인상 

2015년 SBS SAF 연예대상 신인상 (버라이어티 부문)

2016년 SBS SAF 연예대상 우수상 (버라이어티 부문)

2017년 SBS 연예대상 최우수상 (쇼.토크부문)

2018년 백상예술대상 TV부문 남자 예능상

2018년 올해의 브랜드 대상 (남자 예능인 부문)

 

 

 

대한민국의 前 농구선수, 現 방송인

 

대한민국 농구계를 대표하는 국보급 센터입니다 .대한민국 농구 역대최고의 선수 중 하나로 꼽히기도 하죠. 전의 문서에는 센터중에 경쟁자가 없다고 써놨으나 김주성을 더 위로 치는 사람도 많기 때문에 이는 사실이 아닌듯 합니다.

KBL 기록의 사나이기도 한데, KBL 통산 최다 득점(13,231점), KBL 통산 최다 리바운드(5,235개) 기록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또한 한국프로농구 역사상 조니 맥도웰과 더불어 유이한 7시즌 연속 PER 20+의 주인공입니다.아는 형님선 7주 연속 비희망 짝궁이란 기록도 보유중입니다

 

상대 선수들의 집중 견제 탓에 부상을 달고 살았으며, 선수시절 말년에는 골밑보다 외곽을 많이 도는 모습을 보여 줬습니다. 하지만 전성기 시절에는 우월한 신체 조건을 이용한 포스트업에도 상당히 능했으며, 이를 역이용한 미들 슛 또한 상당히 정확했습니다. 미들슛만이 아니라 3점슛도 마찬가지로 포스트업도 막기 힘든데 수비를 달고 쏘는 미들슛, 3점슛도 쏙쏙 들어가니 상대 입장에서는 미칠 노릇이겠죠?. 반칙으로 끊어도 자유투도 정확하니 더 미칠 노릇입니다. 게다가 말년에 외곽을 많이 돌았다는 것도 젊었을 때와의 상대적인 의미이지 실제로는 골밑을 주로 지키며 궂은 일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한국의 운동선수라는 조건에서도 의외로 공부도 상당히 잘 했고, IQ도 140이 넘을 정도로 머리도 좋다고 합니다. 최화정의 파워타임에서 IQ를 정확하게 측정한 게 아니라 진위 여부는 모르겠지만, 일단 공부는 잘 했다고 전해집니다. 참고로 서장훈의 아버지는 국내 유명 대기업의 이사를 역임했습니다.

서장훈의 역대 스탯 국내선수로서는 드물게도 시즌 평균기록 더블더블을 네 차례나 기록한 바 있습니다. 또한 평균 20점 10리바운드 이상을 기록한 유일한 선수입니다. 서장훈 외에 시즌 더블더블을 기록한 유일한 선수는 하승진으로 한 차례 기록한 바 있습니다.

 

또 한국프로농구 사상 용병을 제치고 리바운드 타이틀을 따낸 유일한 센터이기도 합니다.

은퇴 이후 무한도전 등 각종 방송에 가끔 출연하다가, 미스틱엔터테인먼트와 전속 계약을 체결하고 생색 많은 방송인으로서 제 2의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서장훈 농구선수

과거 OB 베어스의 박철순 선수를 좋아해서 서울 학동초등학교 4학년 때 야구에 먼저 입문했습니다. 선린중학교 야구부로 가기 위해 서울 남정초등학교로 6학년때 전학간 후 선린중학교로 진학해 야구부 활동을 했지만, 중학교 1학년 도중 초등학교 친구들 대부분이 있던 휘문중학교 근처로 다시 이사 갈 일이 생겼고 당시 학교군 제도상 야구부 소속으로는 전학이 불가능해 농구부로 바꿨다고 합니다.게다가 마침 180cm를 넘는 키는 농구부에서도 주목할 만했고, 휘문중학교에 농구특기생으로 전학한 뒤 1년 동안은 기본기만 다지다가 중3 때 15cm 폭풍성장하면서 197cm의 거인 센터가 되어 마침내 포텐이 터지게 되었습니다.

 

 

중학교 때부터 같이 활동하던 단짝이자 1년 후배인 현주엽과 함께 휘문고를 고교 정상급의 팀으로 이끌며 주목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나란히 93학번과 94학번 최대어.

실제로 연세대학교를 선택한건 "당시 최희암 감독님이 우리집에 오셔서 저녁을 먹고 가셨습니다. 당시 두 학교에서 경쟁이 너무 치열했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저를 데려가려고 노력했다”고 스카우트 비화를 밝혔습니다. 이어 그는 연세대학교를 선택한 이유는 “친한 친구들이 연대에 더 많았습니다. 그리고 연세대학교가 여학생 비율이 높았습니다. 그래서 대학의 낭만을 제대로 즐길 수 있는 게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대학생 숙소가 이대 후문 쪽에 있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다 1993년 연세대학교에 입학하고 93-94 시즌 농구대잔치에 등장, 1학년 주제에 기존 대학 팀들의 인사이더뿐만이 아니라 기존 실업팀의 국가대표급 센터들까지 떡실신시키며 농구팬들에게 충격과 공포를 선사했습니다. 당시 서장훈만큼의 높이를 가진 농구 선수는 노쇠한 기아의 한기범과 기량이 두드러지지 못한 현대의 정경호 둘뿐이었고, 키는 비슷하다 해도 서장훈만한 힘에 서장훈만한 민첩함에 서장훈만한 공격 기술에 서장훈만한 농구 센스를 가진 선수는 그때까지의 한국 농구에는 없었습니다. 이 당시 국내 농구인들의 희망사항이 "한기범의 키에 김유택의 기량을 가진 선수가 있으면 좋겠다."였고, 서장훈은 이 조건을 충족시킨 한국 농구 역사상 두명 뿐인 선수중 하나였습니다. 다른 하나는 김주성. 서장훈 본인은 후보선수라 전술 훈련에도 잘 끼지 못했었던 중학교 시절에 슈팅 연습을 혼자 열심히 했던 것이 센터치고도 슈팅 능력이 탁월해지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고 평했지만, 사실 서장훈은 대학이나 프로농구 활동 당시 또래 선수들 중에서도 매우 성실한 선수에 속하는 편이었기 때문에 체격이 커지고 주전선수가 되고나서도 슈팅 연습을 항상 따로 열심히 했었다고 알려져 있는데 그것에 의한 영향이 더 컸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당시 연세대 농구단이 실력도 뛰어났지만 인기 자체가 연예인급으로 많아서, 농구팬들에게 어마어마한 인기와 지지를 받던 시절이었는데 최희암 감독은 선수들이 훈련 중 해이한 모습을 보일 때 선수들을 모아 놓고 "너희들이 대단한 줄 아느냐. 너희들이 막말로 연필 하나라도 만들어서 팔아봤느냐. 그냥 농구만 하는 니들이 무슨 생산성이 있는 일을 한다고 거만해지느냐. 모든 게 니들 덕이 아니라 너희를 좋아해주는 사람들 덕이니 항상 사랑을 주는 팬들에게 감사해야 하고 그를 위해 성실히 노력하라"고 하며 무섭게 다그쳤고, 그것이 서장훈의 농구에 대한 생각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고 합니다. 참고로 그렇게 불벼락을 떨어뜨린 최희암 본인은 연세대학교 농구팀의 인기에 힘입어 남성팬티 TRY CF를 찍기도 했습니다.

 

서장훈은 당시 농구대잔치 리그에서 연세대가 한기범과 김유택이 있던 기아자동차를 이기는데 일등 공신 역할을 했고, 플레이오프에서 재차 기아자동차와 대결하는 일은 없었지만, 결승에서 상무의 센터 저승사자 정재근을 제압, 결승에서 1패를 당하긴 했지만 이상민, 우지원, 문경은, 김훈 등과 함께 연세대를 농구대잔치 최초의 대학팀 우승으로 이끈다. 이게 얼마나 대단하냐면, 허재, 강동희, 김유택, 한기범이 모두 뛰고 있던 중앙대조차도 준우승만 하면서 이루지 못한 업적입니다.93-94 농구대잔치 결승전.젊은 시절 몸놀림이 훨씬 가벼운 서장훈을 볼 수 있습니다.

 

1994년에도 서장훈의 공포는 이어졌습니다. 서장훈은 21점 20리바운드 10블록슛으로 트리플 더블을 달성하기기까지 하며 공포의 존재로 군림했습니다. 고려대가 전희철, 김병철을 비롯한 기존의 강력한 선수진에 현주엽까지 입학시키는 데 성공하며 연세대를 노리는 상황에서 두 대학이 마주한 농구대잔치, 경기 도중 이상민이 부상으로 실려나가면서 고려대는 동점을 만들었고 연장전만 가면 유리하다고 할 수 있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연세대에겐 한번의 슛 찬스밖에 없는 상태에서 서장훈은 눈앞에 수비수를 달고서도 중거리슛 한방을 버저비터로 꽂아넣으며 팀을 승리로 이끌고 고려대를 충격에 빠트렸습니다. 서장훈의 운동 능력이 절정이던 시기였는데, 본인 스스로도 이 당시의 자신은 막을 방법이 없었다고 할 정도. 위의 영상이 바로 당시 경기의 영상입니다. 참고로 이 영상은 KBL 07-08 시즌에 추억의 영상으로 KBS에서 편집하여 방송한 것인데, 편집영상이 끝나고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진행자는 다름 아닌 오정연 아나운서. 이상민이 부상으로 잃은 상태에서 1번 시드 연세대는 8번 시드 삼성전자와 플레이오프 1라운드를 맞게 됩니다. 당시 삼성전자는 2번 시드 고려대와 만나기보단 이상민이 없는 연세대와 붙는 게 유리하다고 판단해 정규시즌 막판 석연치않은 고의성 패배까지 불사하며 8번 시드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했습니다. 이상민이 졸업한 연세대가 불리할 것이라는 예상이 많았으나 정작 1차전은 건재한 서장훈의 활약에 대학시절 내내 동기 이상민에게 가려 출전 기회도 제대로 잡지 못했던 백업 포인트가드 김성헌 이 선발출장해 그야말로 이상민이 빙의한 듯한 엄청난 활약으로 연세대가 손쉽게 승리를 가져갔습니다. 삼성은 2차전을 가까스로 잡고 다음 라운드 진출 여부를 최종 3차전으로 끌고갔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국 농구에 길이 길이 흑역사로 회자될 일이 벌어집니다. 서장훈만 철저히 틀어막으면 이긴다고 본 삼성은 서장훈의 학교 선배인 문경은까지 가세해서 서장훈에게 그냥 폭력에 가까운 파울을 남발했고, 그 와중에도 서장훈의 활약은 계속되었는데, 삼성의 센터 박상관은 거친 파울 속에도 서장훈이 득점을 하고 리바운드를 따내자 결국 아예 서장훈의 뒷통수를 그대로 두들겨 패 버리고 맙니다. 연수 부분에 충격을 받은 서장훈은 그대로 코트에서 혼수상태로 쓰러지면서 병원으로 실려간 후 요단강 익스프레스를 탈 뻔하다 살아나고, 삼성은 서장훈을 해치운 덕에 결승에 올라갑니다.

 

이 때 서장훈이 당한 부상은 상당히 심각했는데, 목 다친 부분이 약간만 더 빗나갔어도 전신마비가 올 수도 있었다고 한다. 결국 서장훈은 한국 농구에 환멸을 느껴 1995년 미국의 산호세주립대학으로 유학을 떠납니다. 그러나 애초에 편입생은 1년간 뛸 수 없다는 당시 NCAA의 트랜스퍼 제한도 걸린데다 산호세주립대학이 농구로 알아주는 대학도 아닌지라 미국에서 별로 보여준 건 없이 1년만에 귀국했습니다. 더군다나 국내에서는 독보적인 수준일만큼 서장훈의 기량과 재능도 상당히 좋긴 했지만 미국에는 서장훈 이상의 키와 스피드, 파워를 지닌 선수들이 많아서 미국 농구계에서 대성할 거라고 확신하긴 힘들었습니다. 조재중 해피엔딩 버전 

 

서장훈은 국내 복귀 후 황성인, 김택훈, 조상현, 조동현과 함께 다시금 연세대를 최강팀으로 이끈다. 그리고 다시 농구대잔치. 서장훈이 이끄는 연세대는 당시 센터치고는 단신이지만 주목받는 활약을 보여준 윤영필과 장신 슈터 김성철, 그리고 강혁을 앞세운 팀플레이를 보여준 경희대와 플레이오프에서 맞섰습니다. 서장훈은 이미 경희대의 골밑을 유린한 적이 있지만 경희대는 당시 상승세를 타고 있었기에 새롭게 떠오르는 센터 윤영필과 서장훈의 맞대결이 기대되었는데, 김택훈은 에이스 킬러짓으로 윤영필을 코트에서 응급실로 직행시켜버렸고 서장훈은 맞설 상대 없는 경희대 골밑을 손쉽게 접수합니다. 경희대는 1차전을 그렇게 잃은 후 2차전에서 인사이드의 절대적인 열세 속에서도 강혁이 팀을 이끌며 연세대와 대등하게 맞섰으나, 김택훈이 강혁마저 병원으로 보내버리자 경희대는 더 이상 버틸 힘을 잃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결승. 이상민, 조성원, 문경은이 있는 상무는 현주엽이 있던 고려대를 격파하고 올라오면서 이번에야 말로 우승하겠다고 벼르고 있었고, 준결승에서 연세대의 테러를 본 농구팬들은 상무에게 일방적인 응원을 보냈습니다. 하지만 상무에는 서장훈을 막을 선수가 없었습니다. 서장훈에 의해 제공권을 장악당하며 상무는 패하고, 서장훈은 다시 한번 연세대를 농구대잔치 우승으로 이끌었습니다.

 

그후 프로화된 농구팀에 입단하는 과정에서 갈등을 겪었습니다. 당시 진로그룹은 신생 농구팀을 창단하는 과정에서 연대 농구선수들에 대한 우선 지명권을 가지고 있었고, 당연히 서장훈을 자기들의 신인으로 지명해 놓았는데 이에 대해 서장훈은 선수의 권리를 침해하는 거라며 반발했기 때문입니다.

 

이와 관련해 서장훈의 농구 유학 자체가 이후 프로화되는 실업팀에 입단하면서 대우가 나빠질 것에 대한 불만 때문이었다는 설이 있는가 하면 이 당시 진로 농구팀 단장이었던 사람이 농구대잔치에서 삼성 감독으로서 서장훈을 골로 보낼 뻔한 짓을 지시한 김인건이었기에 서장훈이 진로 입단을 꺼렸다는 말도 있습니다.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서장훈이 졸업 후 현대전자로 가기로 밀약이 되어 있었다는 설. 그 때문인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현대는 KBL 출범 과정에서 상당히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고 프로 전환 후에도 팀내 베테랑 선수인 이영주를 내치는 등 갈지자 행보를 보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진로가 창단해 보기도 전에 부도가 나고 농구 팀은 SK그룹에 인수, 그리고 SK 측이 김인건을 단장에서 부단장으로 찍어내려버리고 최고대우를 약속하자, 서장훈은 SK에 입단합니다.

신인으로 SK 나이츠에 입단한 서장훈은 함께 입단한 현주엽과 함께 소속팀을 우승시킬 것이라고 사람들은 예상했으나, 서장훈과 현주엽은 각자 스탯만 잘 쌓고 시너지 제로의 모습을 보이면서 '시즌 전엔 우승 못하면 바보, 시즌 끝나면 플레이오프 진출 실패'라는 SK 나이츠의 전통 첫 장을 열었습니

 

하지만 다음 시즌, SK가 시즌 도중 활동범위가 겹치는 현주엽을 슈터 조상현과 트레이드하면서 황성인, 로데릭 하니발, 재키 존스와 함께 팀을 99-00 시즌 우승으로 이끌었습니다. 시즌 MVP는 서장훈의 몫. 사실 데뷔 시즌에도 국내 선수로서는 최초이자 지금까지도 유일한 리바운드 1위를 차지했지만, 팀 성적을 이유로 신인상을 못 받았는데, 그 한을 제대로 풀었습니다. 외국 선수와 대적해도 결코 밀리지 않는 존재감을 과시할 뿐더러 되려 외국선수를 압도한 경우도 많았습니다. 

 

그가 MVP를 차지한 99-00시즌을 보면 외국인선수상을 탄 멕도웰과 그의 성적이 거의 비슷합니다. 그리고 2001-02 시즌에는 외국인 1명이 식물 상태였던 만신창이 SK 나이츠를 이끌고 4강에서 KCC를 격파하고 챔피언결정전에서 당시 최고 전력을 자랑한 대구 동양 오리온스와 맞서서 7차전 접전을 이끌면서 역시 서장훈이라는 찬사를 얻었습니다. 사실상 서장훈이 페리맨을 순삭시키며 균형을 맞추었던 것이었습니다.

 

서장훈은 데뷔 팀인 SK에서 2016년 11월 5일까지 팀 내 개인 최다득점자로 남아있었습니다.  SK의 최다 득점자가 된 김민수가 9시즌을 뛰면서 기록한 걸 단 4시즌 만에 기록한 서장훈의 선수시절 위엄이 드러나는 부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자기 발로 나간 선수지만 활약은 엄청났기에 SK에서 구단의 역사를 돌아보는 행사를하면 초청은 꼬박꼬박해서 영상으로 한 번씩은 인사말을 건네곤 합니다. 

 

현재도 SK 나이츠에서 뛰었던 선수 중에 최고의 선수. 서장훈의 시대 이후 SK는 김태술의 2008년을 제외하고 긴 암흑기에 빠져있다가 김선형이 등장한 이후로 겨우 플레이오프에 얼굴을 비추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01-02시즌 종료 후 놀랍게도 FA자격으로 서울 삼성 썬더스로 이적했습다. 팬들이 대단히 놀랄 수밖에 없던 것이 농구대잔치 시절 서장훈에 대한 린치에 가까운 거친 플레이를 가한 삼성이었고 이적 당시 서장훈을 목장훈으로 만든 당사자들인 이창수 & 박상관 두 선배(강을준은 은퇴)가 멀쩡히 팀에 있었기 때문에 삼성행의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본 사람들이 많았고 울산 모비스 오토몬스에 갓 부임한 은사 최희암 감독이 강력히 영입을 희망하기도 해서 모비스로 갈 것으로 예상한 사람들이 많았지만 삼성행이라는 최대의 반전이 일어난 것입니다.

물론 등가교환이라고 당시 삼성이 샐러리캡을 맞추기 위해서 그전 시즌 팀 부진의 원인으로 지목된 우지원을 보호선수에서 제외해버렸습니다. 서장훈으로 인해 쫒겨난 선배가 이상민뿐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서장훈을 목장훈으로 만든 주범들이었던 이창수&박상관은 동시에 방출됐습니다. 스포츠계에서 감독이나 스타선수 영입이 있으면 껄끄러운 관계인 선수나 코치들을 방출시키는 게 관행이라 비판할 일만은 아니지만 서장훈으로 인해 주전이었던 우지원과 나름 전력급 백업센터인 이창수 & 박상관이 동시에 팀을 떠났습니다. 자신의 이적으로 대학선배 우지원이 팀을 떠나게돼서 마음이 안좋았다고 하는데, 몇년 지나지 않아 자신의 이적으로 또다른 대학선배인 이상민을 떠나게 만들어서 너무나도 안타까웠다고 합니다.

 

어쨌든 서장훈이 합세한 서울 삼성은 9년 연속 플레이오프 진출의 서막을 열었고, 05-06 시즌 챔피언결정전 우승을 거머쥐었습니다. 이 시기에 주성타 사건이 일어나면서 목 부상의 재발로 그의 상징이 된 목 보호대를 차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의 일이었고, 서장훈은 부상을 극복하면서 05-06 시즌 삼성의 우승을 이끌었습니다. 그러나 이 05-06 시즌 우승 과정에서 문제가 생기는데, 정규 시즌에서는 서장훈이 활약하며 생애 두 번째 MVP를 수상했지만, 챔피언결정전에서는 안준호 감독이 의도적으로 강혁과 네이트 존슨의 픽 & 롤을 구사하면서 서장훈의 비중은 상대적으로 적었던 것. 연장까지 간 2차전에서는 강혁과 함께 팀을 캐리했고, 접전이었던 3차전은 결승점이 된 자유투 2개를 성공시켰으니 비중이 아예 없다고 할 수 없지만 마지막 4차전에서는 경기 초반만 뛰고 내내 벤치에 앉아 있었습니다. 이 때문인지는 몰라도 그 다음 시즌 삼성과 갈등이 생긴 서장훈은 2007년 다시 한 번 FA로 KCC 이지스로 이적했는데, 이때 보상선수로 이상민이 삼성으로 가게 됩니다.

 

사실 우승에 기여하지 못했다는 일각의 비아냥과는 다르게 챔피언결정전 한정으로 서장훈의 출전시간이 줄었지만, 정규시즌과 플레이오프에선 서장훈이 좋은 활약을 했습니다. 이 시즌부터 평균 득점이 20점 밑으로 내려가긴 했어도 올루미데 오예데지와 네이트 존슨 듀오의 가세로 수비 부담을 덜고 공격에 좀 더 집중할 수 있었고, 특히 플레이오프에서 오리온스의 약한 골밑을 제대로 유린하면서 팀이 체력소모없이 쉽게 챔피언결정전에 진출하는 데 크게 기여했습니다. 당장 서장훈은 해당시즌 MVP였기 때문에 그가 우승에 기여한게 없다는 얘기는 까놓고 말해 그냥 대놓고 헛소리 입니다. 그가 없었으면 애초에 파이널 진출도 힘들었습니다.서장훈은 KCC에서의 첫 시즌엔 팀을 정규시즌 2위로 올리며 나름 활약했으나 4강에서 삼성에게 3 대 떡으로 발렸고, 그 다음 시즌엔 하승진의 등장 이후 출전시간이 줄어들자 트레이드를 요구, 강병현이 포함된 3:1 트레이드가 성사되면서 인천 전자랜드로 이적했습니다. 전자랜드에서는 당시 7~10위권을 헤매며 답이 없어 보이던 전자랜드가 2월 전승을 포함해 13경기 12승 1패라는 대반전으로 팀을 재건, 은사 최희암 감독과 만나며 6강 진출을 이루었고, 전자랜드가 답이 없던 09-10에도 서장훈은 건재했습니다. 유도훈이 감독이 된 10~11시즌 문태종-허버트 힐과 같이 서태힐 트리오를 결성, 전자랜드를 팀 성적 역대 커리어하이인 정규리그 준우승으로 이끌었습니다.

 

 

데뷔 시즌부터 10~11시즌까지 통산기록 12,500점을 돌파했고 리바운드 4,986개로 독보적 1위입니다. 센터 중 유일하게 어시스트 1000개를 넘어섰습니다. 전술한 폭행성 파울로 인한 부상을 제외하면 철저한 몸관리를 통해 잔부상도 별로 없이 꾸준히 시즌을 소화해온 프로의식도 칭찬할 만한 부분. 더구나 현역 주전 선수이기에 프로농구계의 살아있는 전설이라 불러도 무리가 없습니다. 특히 득점 통산기록이 대단한 것은 2위를 다투는 문경은과 추승균보다 2~3,000점 이상 차이가 나는 데다가 서장훈이 문경은보다 3살이나 나이가 어리다는 점입니다.

 

2010-11 시즌후 FA자격을 얻었으나 연봉 2억 5천에 인센티브 1억을 더해 총 3억 5천만원에 1년계약으로 팀 잔류를 선언했습니다. 그러나 이후 LG 세이커스의 이현민+강대협과 1:2 사인 엔 트레이드 형식으로 LG 세이커스로 이적. 유도훈 감독은 2010-11 시즌을 치르면서 종종 팀에 남아달라 요청했었고 서장훈도 별다른 잡음없이 무난하게 팀에 남을줄 알았는데, 이런 트레이드가 터짐으로서(게다가 기사에서 서장훈은 사전에 트레이드 진행을 몰랐다는 이야기도 있어서) 전자랜드 팬들은 프런트를 폭풍 성토. 더군다나 서장훈을 내주고 얻어온 대가가 많이 부족해 보인다는것도(트레이드의 명분을 리빌딩으로 삼았는데 강대협은 30대 중반, 이현민은 30대에 들어선 나이도 있고, 상무 소속이라 로스터를 비워둔다고 해도 2011-2012시즌 5라운드 이후에나 합류 가능. 게다가 강대협, 이현민 모두 요근래 하향세를 보였으니..) 트레이드에 대한 비판의 한 원인으로 보입니다. 어쨌든 원치않은 저니맨이 돼버린 서장훈과 이번 트레이드를 주도한 전자랜드의 2011-2012 시즌 성적은 어떨런지...

 

결과적으로 2011-12 시즌은 서장훈 농구 인생 최대의 흑역사가 되었습니다. 노쇠하고 발이 느려진 상태에서 문태영과 롤도 겹치고, 애런 헤인즈 위주로 공격을 풀어간 LG에서는 그의 자리가 마땅치 않았습니다. 수비 면에서는 송창무가 어느 정도 각성하면서 장신 선수 수비에 굳이 서장훈이 필요 없어진 상황. 여기에 부상까지 겹치면서 완전히 시즌을 망쳤습니다. 그를 트레이드시킨 전자랜드는 6강 PO에는 진출했지만, LG는 6강 PO 진출에 실패하면서 묘한 대비가 되었습니다. 이 때문인지 은퇴냐, 선수 생활 지속이냐를 두고 진지한 고민을 해야 했습니다.

결국 전창진 감독의 부름을 받고 연봉 1억 원에 kt와 계약을 맺고 선수 생활봉사활동을 이어가게 되었습니다.  기자회견을 열어 kt에서 뛰는 12-13시즌 이후 은퇴와 연봉 전액과 사비 1억을 더해 사회기부를 발표했습니다. 서장훈 본인은 은퇴식을 고사했지만 kt는 전설에 대한 예우차원에서 은퇴식을 준비, 2013년 3월 19일 KCC와의 홈 경기에서 은퇴식 및 은퇴경기를 가졌으며, 33득점이라는 놀라운 기록, 그리고 이날 경기의 마지막 득점을 남기며 25년에 걸친 농구 인생을 마감했습니다.

 

서장훈은 데뷔팀 SK에서 2016년 11월 5일까지 팀 내 개인 최다득점자로 남아있었습니다.  이후 SK의 최다 득점자가 된 김민수가 9시즌을 뛰면서 기록한 걸 단 4시즌만에 기록한 서장훈의 선수시절 위엄이 드러나는 부분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자기 발로 나간 선수지만 활약은 엄청났기에 SK에서 구단의 역사를 돌아보는 행사를 하면 초청은 꼬박꼬박 해서 영상으로 한 번씩은 인사말을 건네곤 합니다.1994 히로시마 아시안 게임에 대학 신입생 신분으로 발탁된 것을 시작으로 2006 도하 아시안 게임까지 12년간 성인 대표팀에 발탁되었습니다.

 

이 시기는 중국이 아시아 농구의 1인자였고, 서장훈과 동시대에 왕즈즈(214cm), 야오밍(226cm)이 중국 대표팀에 뛰었기에 아무리 서장훈이여도 높이의 열세는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시안게임 두차례 은메달에 그쳤으며, 중국을 꺾은 단 한번의 대회인 1997년 ABC 준결승때는 대회 내내 중이염때문에 서있지도 못할 정도 국내에서 열린 2002년에 기적적으로 중국을 꺾었습니다. 야오밍을 막다 일찌감치 파울 3개를 범했으나, 끝까지 야오밍을 육탄방어해냈고 연장에서 중요한 첫득점을 3점슛으로 올리는등 활약하며 15득점 6리바운드로 승리에 공헌했습니다. 경기 직후 인터뷰에서 서장훈은 '왜 중국을 넘지 못하는가' 라는 비판을 떠올리며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습니다. 이후 방송에서 정말 이기고싶었고 농구하면서 처음으로 야비한 짓까지해가며 뛰었고, 농구 인생에 있어 가장 열심히 뛰었던 경기라고 술회했습니다. 여담으로, 야오밍이 출전한 중국팀이 아시아 국가에게 패한 유일한 경기가 2002 부산 아시안 게임 결승전입니다. 2006 도하 아시안 게임 무대는 안일한 대회 준비와 선수선발으로 형편 없는 경기력을 보였으며, 결국 5위에 그치는 수모를 겪었습니다. 서장훈도 부상이 있는 상태로 참가하여 최부영 감독에게 '센터 본능'을 잃어버렸다며 혹평을 듣기도하며 갈등을 겪었고, 결국 이 대회 이후 서장훈은 대표팀을 은퇴하고 이후의 복귀 요청도 고사합니다. 한국 농구 사상 최고 센터의 국가대표 은퇴로는 씁쓸한 모양의 은퇴. 아시안 게임 금메달 1개, 은메달 2개를 따 냈습니다. 

전혀 그럴 것 같지 않지만 경기력 면에서도 비판을 받았는데, 골밑 경합, 리바운드 등 센터의 본분을 다하지 않고, 프로 데뷔 당시만 해도 골밑에서 경쟁력이 있었지만 외국인 센터들의 수준이 높아지자 몸싸움을 기피하고 외곽으로 나와 중장거리 슛에만 몰두하며 팀 성적보다는 스탯관리에만 몰두한다, 센터로서 자격 미달이다라는 내용의 비판이었습니다. 하지만 서장훈의 전성기 대부분의 득점이 포스트업을 통한 골대근처로 밀고 들어온 이후 슛팅을 하는 방식의 페인트존 슛팅에 의한 득점이었습니다. 가끔 던지는 중거리슛은 그 당시 토종 센터의 슛팅능력을 넘어서는 정확도였기에 기억에 더 남은것일뿐, 기본적으로 힘을 바탕으로한 페인트존내외 득점이 주공격루트였습니다.

 

 

가끔씩 던지는 중거리슛은, 대학교 때부터 꾸준히 40%대의 3점슛 성공률을 기록할 정도로 정확도가 높은 편이었기 때문에, 자신이 가지고 있는 공격 옵션을 최대한 활용했습니다.

 

그러다가 전성기를 지난 이후 더 이상 용병 상대로 골밑경쟁력이 없어질 시점에서, 포워드 플레이로 변신하게되는데 3점라인에서 공을받아 슛 혹은 드라이브인을 하는 스타일입니다. 이건 선수생활 후반에 바꾼 스타일이지 전성기 스타일은 아닙니다. 물론 이때에도 매치업 상대가 토종선수일 경우는 다시 골밑 포스트업 중심은 공격을 했습니다.  

 

역시 압도적인 빅맨으로 불리는 김주성의 경우 선수 말년에 3점슛터로 전업한듯한 변신을 하였습니다. 최고센터 김주성, 어떻게 그는 '3점슈터'가 됐을까 나무위키 내 김주성항목을 보더라도, 3점슛을 던지기 때문에 상대가 수비하기 더 어려운 선수가 됐고, 팀 기여도가 더 높아졌다며 칭찬하는 대목이 나오지, 단순히 외곽슛을 던진다는 이유로 비판받지 않습니다. 즉, 나이먹어 외곽슛을 던진다는 것이 무조건 비판받을 이유는 아닌 것입니다.그리고 리바운드 역시 수치상으로 매우 뛰어나며 본인은 자신의 득점의 6,70%는 항상 골밑공격으로 이루어진다고 항변해 왔습니다.

 

느린 백코트와 불성실한 수비 또한 비판받았습니다. 단지 나이먹은 이후 키에 비해 비정상적으로 빠른 김주성이 등장해서 김주성과 비교되는 것이기 때문에 서장훈이 억울한 면이 없지 않습니다. 

 

위에 서장훈의 스피드의 대한 것은 잘못된 예시로 서장훈의 비판점은 스피드가 느리다는게 아니라, 백코트를 느리게 했다는 점입니다. 즉 수비에 성실히 임하지 않았다는 점이 비판점이지 스피드 자체가 비판점이 아닙니다. 실제로 느린 백코트 때문에 속공수비에 전혀 도움이 안되었기 때문에, 수비에 관한 비판에서 자유로울수 없습니다.

 

공격에서 미들슛을 던진다며 비판받는 경우도있지만, 센터 포지션임에도 골밑몸싸움 기피에 따른 불성실한 수비'라며 지적받는 경우도 있는데, 이 부분은 정말 말도 안될정도로 오해입니다. 전성기 시절 수비수 서장훈은 항상 상대 센터용병과 매치업을 했습니다. 상대 센터가 골밑 플레이를 하는데 수비수인 서장훈이 골밑을 벗어날수가 없습니다. 애초에 매치업 상대가 용병센터인데 수비수 서장훈이 골밑을 벗어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간간이 중거리슛 던지는 공격수 서장훈이 골밑을 버렸다고 과잉 비판은 그나마 약간이라도 이해 가능하지만, 상대 용병센터를 수비했던 서장훈이 골밑을 벗어날 수가 없으니 애초에 말이 안 되는 비판인 것이습니다. 즉, 수비와 공격을 구분 못하는 비판일 뿐이습니다. 

 

서장훈은 노쇠 이후 팀 수비에 약점을 드러낸것이지, 전성기 용병센터와 일대일 매치업에 밀려나는 일이 거의 없는 그야말로 공격과 수비 양측면에서 우편배달부 칼 말론 안정적인 플레이를 했습니다.

 

서장훈이 용병센터와 매치업하는 것 하나로만 봐도 팀 수비에 기여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매치업에서 남는 용병은 상대 국내 주득점원을 봉쇄하면되는데 이걸 극대화한 사례가 1999~2000시즌 로데릭 하니발이란 수비전문 용병의 기용입니다. 서장훈 재키존슨이 골밑을 방어하는 상황에서 로데릭 하니발은 단신용병으로 상대 한국인 주득점원을 봉쇄했습니다. 사실 일반 한국인 선수는 용병을 일대일로 막기도 힘들 뿐더러, 뛰어난 용병 수비수의 수비를 뚫기도 매우 힘들었습니다. 서장훈이어서 가능한 것이습니다.

 

이 전략이 극대화 된것이 1999~2000시즌 챔피언 결정전이었습니다. 당시 상대는 최강 전력의 현대였습니다. 역대 최고의 용병 맥도웰을 보유한 현대는 챔피언전2연패를 한 거함이었는데, 맥도웰이 단신용병이지만 골밑플레이가 일품이었습니다. 챔피언전에서 최인선감독이 기발한 수비전략을 썼는데, 주로 상대 한국인 주 득점원을 봉쇄하던 로데릭 하니발이 이상민을 막고, 상대센터를 막던 서장훈이 4번으로 뛰넌 맥도웰을 막았습니다. 맥도웰과 서장훈은 10센티 정도의 차이였는데, 이상민은 하니발에 막혀서 볼 간수하는것 조차 굉장히 신경써야할 지경으로 패스길도 많이 막혔고, 맥도웰은 서장훈의 높이에 밀려서 원활한 플레이가 힘들었습니다. 공격에서는 로데릭 하니발을 주공격옵션으로 사용하면서 상대의 예상을 완전히 뒤집는 전략으로 최강 현대를 꺾고 우승하게 됩니다.

 

 

어쨌든 서장훈이 노쇠 이후 자유계약 용병센터에 밀려나고, 또 허리 발바닥 부상등으로 갈수록 느려져서 팀수비전술에 수비가 약해졌습니다. 이건 노쇠화 이후에도 수비력 약화가 천천히 온 김주성에 비해 수비력 저하가 빨리 온셈입니다.  

 

즉, 노쇠화가 된 이후에 느려지면서 지역방어등 여러 수비테크닉면에서 팀의 수비밸런스에 손해를 끼친건 사실인데, 이건 노쇠화 이후 어쩔수없는 현상입니다. 이것 역시 상대적으로 수비에 강점이 있었던 김주성과 비교되는 면인데, 사실 김주성이 센터지만 유난히 스피드가 있어 지역방어 등 수비조직력에 도움되는 강력한 수비수였던 거지 전성기 서장훈이 수비가 약했던 게 아닙니다.

 

덩크슛이 적었다는 점도 꽤나 욕을 먹었었습니다. 최근에서야 김선형이나 김종규등 비교적 토종 선수들의 덩크가 많이 나오는 편이지만 서장훈의 선수시절엔 국내선수의 덩크가 희귀한 볼거리였고 그나마 김주성이 몇차례 보여주는걸 제외하면 시즌 내내 총 횟수가 한손에 꼽는 수준이였습니다. 볼거리에 목마른 팬들은 국내선수중 최장신이던 서장훈이 덩크를 좀 시도해주길 바랬지만 원맨 속공 같은 노마크 상황에서도 레이업을 올려놓아 아쉬움을 샀던 것입니다. 본인은 자신의 덩크가 외국인 선수들의 덩크에 비해 멋이 없어서 잘 시도하지 않는다고 인터뷰했습니다. 또한 덩크나 레이업이나 성공률은 비슷한 반면 덩크의 체력소모가 훨씬 커서 굳이 할 필요가 없다는 이야기도 했습니다.

 

물론 이는 프로시즌 이후의 농구팬들이 주로 가하던 비판이었으며, 농구대잔치 시절부터 그를 봐 온 올드팬들은 대부분 서장훈에 대해 불쌍하다는 반응을 보입니다. 가령 위에서 언급한 삼성전 때의 폭력 수비 사건. 그리고 프로에서 '주성타'를 비롯한 수많은 폭력 수비 등등. 그만큼 국가대표나 소속팀에서나 궂은 일을 많이하고 험한 꼴 많이 받았으나 돌아오는 건 욕밖에 없으니... 사실 서장훈이 받는 비판의 대부분은 상대 선수들의 상식 이상의 견제와 목 부상에 기인한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불쌍한 거 맞다. 하지만 위와 같은 비판들이 시간이 흐를수록 논파되거나 정상 참작되며 긍정적으로 재조명받고 있습니다. 어쨌든 한국 농구계의 전설적인 선수이니... 특히 베테랑이 되면서 인터뷰도 자주 있었고 신문 기사에서도 자주 본인의 목소리를 냈는데, 그 동안 농구팬들에게 험상궂고 짜증만 많은 이미지로 알려져 있던 서장훈은 인터뷰를 통하여 똑똑하고 말도 잘하는 이미지로 돌아서게 되며 이미지 회복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 후에도 늘 개념찬 인터뷰를 보여줍니다.

 

다만, 여러 팀을 돌아다닌 통에 어느 팀의 프랜차이즈 스타로 기억되기는 어려울 듯 합니다. 어떤 의미로 보자면 농구계의 저니맨. 한국을 대표하는 센터로 농구사에 길이 남겠지만, 특정 팀의 영웅은 되지 못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입니다. 단 굳이 따지자면 SK 혹은 서울 삼성의 레전드로 볼 수 있겠습니다.

 

이는 서장훈의 2번의 MVP와 우승을 차지한 팀이 각각 SK와 삼성이고 그가 뛴 기간동안 최전성기를 누렸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의 등번호인 11번이 영구결번 된다면 이 두 팀에서 받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하지만 본인 스스로가 영구결번에 부정적이라 영구결번이 될 확률은 낮은 편입니다.

 

그 외에 01년과 03년에 음주운전 전과가 있어서 까이는 것도 있습니다. 01년 9월에 음주운전으로 인해서 면허가 취소되었는데 02년 7월 2002 월드컵 기념 대사면으로 면허가 회복되었습니다. 그런데 이후 불과 8개월만에 6강 플레이오프 중 음주 운전이 적발되어 다시 면허가 정지되습니었다. 그리고 이 여파로 인해서 플레이오프에서 삼성이 탈락했고 까임의 단초를 제공하였습니다.

 

 

 

서장훈 농구선수 은퇴이후

선수 생활을 하던 시기 궂은 일을 안하고, 득점과 리바운드등 드러나는 성적에만 신경쓴다는 비판도 있으나 당시 시대적 상황을 보면 좀 억울한 면이 있습니다. 사실 한국프로농구가 출범한 이후 외국인 선수 도입 이후 한국 농구의 방향이 바뀌어버렸습니다. 황인에 비해서 흑인의 기본 신체적 능력이 아주 뛰어나기에 신체적 능력이 중요한 농구에서 흑인과 황인과의 격차가 크며, 프로가 출범 이후 외국인 용병이 모든 팀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득점, 리바운드등 농구의 핵심적 스탯을 용병이 장악해버렸습니다. 즉 서장훈과의 매치업 대상 선수들이 팀마다 두 명씩 생겼다는 것 입니다.

 

첫 우승팀인 부산 기아 엔터프라이즈의 경우 국가대표 센터 김유택이 순식간에 식스 맨이 되고, 허재가 팀에서 존재감이 없어져서 결국 밀려나는 상황이었습니다. 실제로 당시의 기아의 상황만 봐도 두 명의 용병인 클리프 리드와 저스틴 피닉스 이 두 명이 득점 리바운드를 장악해버리니, 그 동안 득점원 역할을 해줄 국내 선수 해결사는 필요가 없어지고, 그저 용병에게 패스나 잘 해주는 포인트 가드와 용병이 빼준 공을 받아서 외곽슛이나 던져주는 슈터... 수비가 되면 더 좋고... 정도, 그리고 용병이 쉴 때 백업을 해주는 식스 맨인 조동기나 앞서 말한 김유택이 필요할 뿐이었습니다. 하물며 다른 팀은 말할 것도 없었다.

 

결국 팀 플레이와 궂은 일을 잘하고 수비를 열심하는 선수 모아놓고 그 위에 뛰어난 용병 둘을 얹으면 우승하기 좋기에 당장의 우승을 위해선 감독은 그냥 용병 뒷받침을 잘 해주는 선수를 모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결과 연세대 선배인 우지원은 선수 후반기로 갈수록 수비 참여를 하고 캐치 앤 슈터로 변신에 성공해서 적응했고, 원래 고려대학교 센터 출신이자 서울 삼성 썬더스 시절 동료였던 이규섭도 우지원과 비슷하게 수비력을 갖춘 캐치 앤 슈터가 되었습니다. 라이벌이었던 현주엽은 포인트 포워드라는 이름 아래 용병에게 패스해주는 걸로 선수생활을 이어갔습니다. 그런 상황에서도 여전히 한국 선수가 보조가 아닌 중심이 되어서 경기를 끌어갈 수 있는 경우는 서장훈과 방성윤, 그리고 문경은의 프로 초기와 2000~01 시즌 MVP인 조성원밖에 없었으며, 서장훈만이 팀내 1옵션으로서 롱런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시간이 흐르며 국내 선수 중 살아남아서 각광받은 선수는 대부분 용병을 보조하는 궂은 일을 하는 선수들이었습니다.

 

서장훈은 인터뷰에서 이런 식으로 궂은 일을 하는 선수가 더 가치를 인정받는 KBL의 풍토가 아쉽다고 토로하고 있습니다. 그의 주장의 요지는 용병과 정면으로 대결해서 평균 20점씩 넣을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선수들도 팀의 중심이 되지 못하여 궂은 일을 하는 스타일, 용병을 보조하는 쪽으로 방향을 바꾸었다는 것이고, 그런 이유로 한국농구에 에이스 역할을 할 만한 선수가 사라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서장훈은 궂은 일을 하는 선수는 아니었지만, 능력이 떨어져서 그렇게 될 바에야 은퇴를 하겠다고 이야기했던 선수입니다. 실제로 서장훈의 이야기가 틀린 말이 아닌게 시즌이 진행될수록 점차 국내 선수의 득점과 리바운드 등의 기여도가 낮아져서, 2015년 현 시점에서 팀 공격의 중심으로 활약하는 국내 선수는 귀화선수인 문태영 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이런 식의 화려하고 개인 능력으로 득점하는 선수가 아닌 궂은 일을 하고 성실한 선수가 더 인정받는 KBL이 오히려 비정상이며 우물 안 개구리가 되었다는 이야기들도 나오는 상황입니다. 궂은 일을 하는 선수가 팀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건 당연하지만 그 선수가 화려하게 득점하고 에이스 역할하는 선수보다 잘 한다고 볼 수 있는건 결코 아닙니다. 야구로 치면 제아무리 홀드를 많이 따내는 중간계투라도 15승을 해 줄 수 있는 선발투수에게 명함을 내밀 수 없는 것처럼. 보통 어떤 스포츠건 궂은 일을 하는 선수는 팀의 입장에서 좋아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그 궂은 일이 저평가받기 때문에 그에 대한 보상차원의 접근입니다. 궂은 일이 주목받는 일이 많다면 그건 이미 궂은 일이라 부를 수도 없습니다.

 

사실 다득점, 다포제션 게임인 농구에 있어서 팀 구성의 기본은 뭐니뭐니해도 득점이고, 이 때문에 농구는 샷 크리에이팅이 되는 스코어러가 팀의 기둥뿌리이자 대들보가 되는데, KBL 농구는 이를 전부 외국인 선수에게 맡겨버렸기 때문에, 1)외국인 선수가 아예 못해서 망하거나, 2)외국인 선수가 스코어러 형이 아니었거나, 3)외국인 선수가 다치기라도 하면 국내선수 중 아무도 스스로 슛을 던질 수 없는 구성의 팀은 아예 득점창출이 안 되는 팀이 되고, 용병을 단 1초도 코트 밖에서 쉬게 할 수 없는 리그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 항목에서 많이 언급된 궂은 일은 쉽게 말해 외국인 선수가 에이스인 상황에서 보조를 한다는 이야기 입니다. 쉽게 말해서 외국인 보조라는 이야기입니다. 경기의 주인공이 용병이 된 상태에서 용병 보조, 수비 가담을 열심히 하고 용병이 빼준 공을 노 마크 3점 슛을 던질 수 있는 선수가 각광받는 시대란 이야기입니다. 그 때문에 역대급 슈터로 불리던 문경은은 프로 초기에 팀의 중심이었지만, 차차 단순한 캐치 앤 슈터로 플레이 스타일을 바꾸어 이충희같은 압도적 커리어와 스타일을 갖지 못했습니다. 이후 등장한 방성윤은 해결사 능력을 보여주었지만 잦은 부상으로 29세에 은퇴, 그 이후 조성민의 13~14시즌 각성 전까지 토종 슈터는 한동안 찾기 어려웠습니다.

 

또한 프로 초기에는 김승현같이 용병에게 볼 배급해주는 포인트 가드가 득세하다가 나중에는 궂은 일 잘하는 양동근과 같은 포인트 가드가 득세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국제 대회에 출전하는 한국 선수 중에 해결사가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받아 먹는 슈터가 아닌 자기가 찬스를 만들어 해결할 능력을 가진 슈터와 큰 선수를 상대해야 할 빅맨이 부족한 황당한 상황으로 한국 농구가 흘러가기도 했습니다. 서장훈 이후의 스타인 김주성과 김승현은 원래 실력도 출중하지만, 외국인 선수에게 잘 맞춰주는 스타일로 더 주가를 올린 것입니다.

 

그 결과 국제대회에서 접전상황에 점수 내고 어려운 상황을 해결해줄 스타 선수가 없어졌습니다. 만일 혼혈 선수인 문태종이 한국에 귀화해주지 않았다면 2014년 아시안게임 금메달은 힘들었을 것 입니다. 대한민국의 농구대표팀이 2014년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획득하자 일부 몰지각한 중국인들은 한국 새끼들이 실력이 안되니까 미국 선수를 불러다가 서류조작해서 우승했다는 헛소리를 했지만 문태종은 혼혈이기만 했지 문태종의 국적은 엄연히 대한민국입니다.

 

물론 서장훈도 나이를 먹으면서 외곽으로 밀려나는 경향은 있었으나, 자신이 중심이 되어서 득점하고 리바운드를 잡으며 경기를 이끌어가는 스타일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어쨌든 서장훈은 마지막 두 시즌을 제외하고는 소속팀을 포스트시즌에 꾸준히 올린 선수였으며, 수비 능력도 나이가 많아 밀리는 것이지 기본적인 몫은 해주었습니다.

 

 

 

은퇴이후 방송인 서장훈

 

보통 스포츠 선수들이 은퇴 후 원래 몸 담궜던 분야와 연관된 업종에 종사하는 것과는 달리, 서장훈은 은퇴 이후 농구계에서 종사하지 않고 방송 활동을 하였습니다. 원래 대중에게 인지도가 높은 인물이고 오직 그만이 가지는 207cm의 장신 슈퍼스타 농구선수 캐릭터가 있는 데다가 머리도 좋고 눈치도 있으며 입담도 좋습니다. 1990년대에도 예능에 자주 나왔는데 은퇴 후 주변 인맥들을 통해 여기저기 얼굴을 비추다보니 자연스럽게 방송계의 러브콜이 생기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예능인으로 전직했다는 점에선 강호동과 비슷하지만, 강호동이 이경규라는 강력한 버프를 받고 있었고 주로 메인으로 활약한 것과는 달리 서장훈은 서포트 없이 개별적으로 활동하며 메인보다는 (존재감 강한) 보조로 나오는 느낌이 강합니다.

 

실제로 예능의 도전을 한 계기는 은퇴 후 6개월 동안 자유의 몸을 가졌는데, 평생 운동선수로서 규칙적인 생활을 하다가 안 하니 뭔가 하고 싶은 일을 찾게 된 것이라고 합니다. 농구선수 시절 안티팬도 상당히 많았고 차가운 사람이라는 평을 받았는데, 이런 오해와 편견을 줄이고 싶다 합니다. 당분간은 방송일로 대중 앞에 서서 본인을 솔직하게 알리면서 소통을 해도 괜찮지 않을까 하고 예능에 도전을 하였다고 합니다.

 

"은퇴 후 6개월 동안 아무것도 안 하면서 놀았어요. 평생을 규칙적인 생활을 하던 사람이 하는 일 없이 오랜 시간을 보내는 게 어렵다는 것을 그때 알게 됐어요. 그러던 차에 방송을 하게 되면서, 일주일에 한번이라도 고정적인 일을 갖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또 하나는 방송을 하면서 대중의 시선이 따뜻해진 것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에요. 저에 대한 오해와 편견이 줄면서 당분간은 이 일을 하면서 대중 앞에 저를 좀 더 솔직하게 알리면서 소통을 해도 괜찮지 않을까, 생각해요... (중략) 부모님은 제가 운동에만 과몰입하는 것을 경계하셨어요. 교육적인 부분에 많은 신경을 쓰셨죠. 어렸을 때는 그게 피곤하고 힘들어서 싫었어요. 하지만 나이를 먹으면서 저 스스로 농구뿐 아니라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갖고, 또 거기에서 궁금증이 생기면 관련 책을 찾아서 읽는 습관이 큰 도움이 되는 것 같아요. 신문은 원래 구독했었는데, 요즘엔 너무 시간이 없다보니 챙기지 못해 배달을 받지는 않아요. 하지만 요즘엔 다양한 경로로 보도를 접할 수 있잖아요"

 

 

 

원래도 스포츠를 통해 인지도가 높았지만 방송을 통해서 다시 한번 인지도가 쌓였기 때문에 우리동네 예체능, 런닝맨 같은 방송사들의 간판급 예능 프로에도 다수 출연했습니다. 2013년 7월 6일 방송된 무한도전 웃겨야 산다 특집때 뮤지컬 중 목부상으로 입원한 정준하의 대타로 출연해 국내 최장신 예능인 반열에 올랐습니다. 본인은 "이거로 뜨고 싶은 마음 없어요. 이게 마지막 방송이에요." 라며 격하게 부정했지만 유재석은 녹화장에 나타나자마자 못친소 2회를 위해 아껴둔 게스트라며 기대감을 표출했을 정도 입니다.

 

결국은 2014년 1월 3일부터 시작된 금요 예능 사남일녀에서 김구라, 김민종에 이은 셋째 역할로 고정 예능인으로 데뷔해 좋은 모습을 보여주며 합격점을 받았다. 실제로는 당시 PD인 강영선 PD와 작가진들이 새로운 내용을 통해 효(孝)를 실천하고 리얼 버라이어티에 농구계 최고 스타 서장훈이 참여 한다면 새로운 재미를 추구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서장훈도 매번 고사했지만 제작진의 설득에 승낙할 수밖에 없을 정도였다. 훗날 서장훈도 "이번에 참여하게 된 프로그램은 효를 실천하고 의미를 다시 생각할 수 있다는 취지에서 공감이 됐다. 쓸쓸하고 힘들게 살아가시는 분들을 도와주겠다는 의미가 아니라 힘든 생활을 함께 겪으면서 그분들께 웃음과 정을 드리고 싶다는 생각에 참여하게 됐다"고 말했다. 물론 힘 쓰는 장면도 많이 나오긴 하지만 이제 운동만 잘한다는 이미지는 거의 벗어던진 셈. 이상민이 삼성 감독에 취임한 후 서장훈이 코치로 하마평에 오르내리자 시청자들이 말도 안 되는 소리라도 '사남일녀 해야 된다 가지 마라'라는 반응을 보인 것을 보면 시청자들의 지지도 받고 있다. 본인 역시 흥미를 느끼고 있는 듯 하다.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지도자 생활보다는 예능이 재미있다며 이상민 감독의 제안을 정중히 거절했다고 한다.

 

 

 

사남일녀 출연 덕분에 라디오 스타에도 출연하였고 여기서 재밌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결국 연말에 한 해 동안 가장 재밌었던 게스트 중 한 명으로 한번더 라디오 스타에 출연하면서 상당한 예능감을 보여줬다. 거기다 예전부터 김구라가 종종 서장훈의 재테크(후술한 부동산 수익)를 언급한 일이 있었는데 이 덕에 라디오 스티ㅣ에서 윤종신이 붙인 서셀럽이 캐릭터화되면서 예능 안착에 긍정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이전부터 방송 적응이 잘되기도 해서 전업 예능인이 되기에 좋은 운을 탄 상태.

 

2014년 8월 10일 아빠! 어디가?에 우연하게 윤후의 모습을 봤는데 윤후의 매력에 빠졌다고, 윤후의 농구선생 스승으로 깜짝 출연했다.

그 후 새로 개편된 세바퀴의 고정이 되었다.

 

2014년 12월 13일 무한도전 유혹의 거인 편에 주연으로 출연, 맹활약을 펼쳤다. 무려 3주에 걸친 낚시로 무한도전 멤버들을 훌륭하게 낚았다. 정준하, 하하, 박명수와는 원래부터 친분이 있었고, 정형돈도 후배인 이규혁을 통해 연락을 한 적이 있을 정도로 무도 멤버들과 친한 사이라서 시너지가 컸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정준하와 함께 멤버들을 꼬여내기 위해 갖은 사탕발림과 협박을 적절히 배합하는 진상 콤비는 이날 방송의 백미였다. 적절한 리액션과 자연스러운 멘트로 유재석을 비롯한 무도 멤버들로부터 MC 꿈나무라는 소리까지 들었다. 그리고 이후 무한도전 나 홀로 집에에서도 최종보스 역으로 출연 사실상 이전의 데프콘처럼 비정기 객원 멤버 취급이다(...). 무도큰잔치에서는 농구계 동료 현주엽을 데리고 나왔는데 유재석에게 "한 달에 한 번씩 꼭 나온다"며 디스당했다.

 

일밤 아빠! 어디가?의 후속 프로그램이었던 애니멀즈에 캐스팅되었다. 그러나 애니멀즈는 몇 달 지나지 않아 폐지.

 

2015년 1월 15일 썰전에도 나왔는데 본인이 방송을 하게 된 계기 중 하나는 본인에 대한 선입견이 있는데 그걸 깨고 좀 더 소통하기 위해서 라고 밝혔고 언젠가 자신에 맞는 팀을 지도해보고 싶다는 말도 하였다.

 

1월 28일 미스틱엔터테인먼트와 전속계약을 체결했다.

 

2015년 2월 20일 엠스플의 프로농구 SK-kt 경기 중계에서 일일 해설을 맡았는데 무도큰잔치 녹화 중에 현주엽이 자기 해설할 때 한 번 같이 하자고 해서 나왔다고 한다.

 

무한도전 식스맨 당시 후보로 거론되며 1차 토론회까지 출연했지만 투표에서 탈락한 데다가 방송에서 과거 음주운전 이력을 어물쩍 넘긴 것 때문에 논란이 되기도 했다. 다만 무한도전 식스맨 : 시크릿 멤버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소재 자체가 논란과 병크 투성이인지라. 이후로 무한도전에 더 이상은 나오지 않고 있다가 무한도전 예능총회에 오랜만에 나왔다.

동상이몽, 괜찮아 괜찮아 고정 패널로도 출연 중이다. 3회에 출연했던 무용소녀 김현아 편의 경우 유독 서장훈의 존재감이 돋보였는데, 다른 출연진들이 단순히 엄마와 딸의 1차적인 입장에 대한 생각을 이야기하는 수준이었던 반면 서장훈은 예체능계 출신 경험을 토대로 딸의 건강에 대해 조언하기도 하고, 딸의 어머니에게 "코치의 역할은 코치에게 맡겨야 한다"며 진지하게 설득했다. 게다가 단지 딸을 대변하는 선에서 그치지 않고 자신의 부모님에 대한 이야기를 털어놓으며 어머니가 스스로의 인생을 더 즐기길 바란다고 하면서 분위기를 이끌어 나갔다.‘동상이몽’ 서장훈의 기가 막힌 어시스트..당신이 MVP 방송 이후 시청자들의 평가도 좋았으며, 프로그램 성격에 가장 걸맞은 패널이라는 말까지 나왔다. 후에도 짤이 캡쳐되어 각종 커뮤니티에 돌아다니며 많은 공감을 얻어내기도.

 

자신의 키나 이혼 경력, 결벽에 가까운 위생 관념 등으로 자신을 놀리는 것은 아무렇지 않게 받아주지만, 본인의 농구 인생에 대해서 터치하고 시비거는 것은 상당히 싫어한다. 아는 형님에서 본인의 인생 사진으로 은퇴식 당시 사진을 가지고 와서도 농구에 대해서만큼은 농담을 하고 싶지 않다며 진지한 이야기를 했다.

 

세바퀴에서 우지원과 비교해서 누가 농구를 더 잘했냐라는 질문을 받았을때 상당히 언짢은 표정을 짓기도 하였다. 김구라 및 다른 사람들이 포지션이 다르니까 비교하기 힘들다고 했기 때문. 물론 우지원도 영구결번까지 기록한 굉장한 실력의 슈터이지만, 서장훈은 2016년 농구인이 뽑은 역대 최고 선수에 허재와 함께 공동 1위인, 그야말로 한국 농구 사상 최고의 선수였다. 게다가 우지원이 후배라면 모를까 전성기를 함께한 연세대학교 선배다 보니 대놓고 "내가 지원이 형보다 더 잘하지"라고 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방송 활동 초기에 계속 밀던 그냥 유명인 컨셉은 이제 버린지 오래. 이제는 아예 방송을 전업으로 삼고 있고 건물주 캐릭터로도 웃음을 뽑아내는 중. 시사 상식이 풍부하고 소위 촉까지 좋기 때문에 앞으로도 방송계에서 승승장구할 것으로 보인다. 현재 그의 방송인으로서의 캐릭터는 초창기 방송인 시절 같은 프로그램에 동료였던 김구라의 영향을 크게 받은 것으로 보인다. 퉁명스러운 말투나 지식 자랑을 할 때 특히 그런 모습이 드러난다.

 

 

 

그의 인맥 때문인 점도 있겠지만, 예능적 역량이 매우 우수한 편이다. 2013년 무한도전에 출연하며 예능에 발을 들인 이후로, 2017년 까지 4년 사이에 무려 7명의 연예대상 수상자와 고정 프로그램을 했다. 물론 메인 MC는 아니고 패널이나 보조 MC 격이었지만, 만약 예능감이 없었다면 인맥으로도 한계가 분명한 곳이 예능계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굉지한 것이다. 물론 강호동급의 메인 MC로 발돋움 하느냐는 또 다른 이야기이지만.

 

특히 아는 형님 전후로 하여 예능 활동이 확 바뀌었다. 아는 형님 출연을 전후로 연예인이라 불리기도 꺼리던 사람이 본인이 직접 콩트에 참여하는 등 태도 자체가 확 바뀌었다. 이후 거인, 건물주, 이혼남, 츤데레, 결벽증 캐릭터가 붙으면서 본인이 적재적소 활용하는 모습을 보이며 여러 예능에서 활용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였고 그 결과 여러 예능에서 고정으로 들어가며 본인에 캐릭터를 이용해 방송을 이끌어나가는 모습을 보여주고있다.

박명수가 호통 개그로 유명한 것에 비해 서장훈은 현실 개그로 정곡을 찔러 유명하다. 예능인답지 않게 말을 굉장히 현실적으로 하며 그것 때문에 좌절하는 다른 출연자의 모습을 보면서 깨알 같은 재미를 준다. 그런데 서장훈이 하는 말이 주로 현실적인 발언일 수밖에 없는 것은 그가 평생을 승부의 세계에서, 이겨야 살아남는 곳에서 살아왔기 때문이다. 서장훈이 밝히는 과학자들에 캐스팅된 것은 이러한 그의 성향 때문이다.

 

2017년 SBS 연예대상에서는 미운 우리 새끼와 동상이몽, 너는 내 운명에서의 활약을 인정받아 쇼토크부문 최우수상을 수상했다.

 

2018년 5월 3일 54회 백상예술대상에서 남자 예능상을 수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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