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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통령

뚜스따스 2019. 11. 19. 2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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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대한민국 19대 대통령인 문재인 대통령에 대한 정보를 여러분에게 드리고자 합니다. 문재인 대통령은 2017년 5월 10일 대한민국 제 18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는데요, 오늘은 문재인 대통령님에 대한 정보를 확인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문제인 대통령님과 관련된 연관 검색어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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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953년 1월 24일 (66세)

경상남도 거제군 거제면 명진리

사저

경상남도 양산시 매곡동

재임

2017년 5월 10일 ~ 2022년 5월 10일

가계

남평 문씨 충선공파 33대손

본적

함경남도 흥남시

부모

부친 문용형, 모친 강한옥

형제자매

2남 3녀 중 장남

배우자

김정숙

자녀

문준용문다혜

학력

경희대학교 법학 학사

병역

육군 병장 만기전역

종교

가톨릭 (세례명티모테오)

신체

172cm, 66kg, B형

정당

더불어민주당

의원 선수

1

의원 대수

19

약칭

 

 

문재인 대통령이 국민과의 대화에서 ‘조국 사태’와 관련해 “송구스럽다”라고 사과했다.  19일 생방송된 MBC ‘국민이 묻는다 2019 국민과의 대화’는 대통령과 함께 다양한 정책에 대해 소통하고 의견을 듣는 프로그램으로 배철수가 진행을 맡았다. 이날 조국 전 법무부 장관과 검찰개혁에 대한 질문을 받은 문재인 대통령은 “인사문제는 참 곤혹스럽다. 특히 조국 전 장관은 장관으로 지명하고 지지하는 것과는 별개로, 결과적으로 많은 국민들에게 갈등을 주고 분열을 조장한 것 같다. 정말 송구스럽다”라고 말했다. 이어 검찰 개혁에 대해 문재인 대통령은 “검찰개혁의 하나는 검찰의 정치적 중립성을 제대로 확보하는 것이다. 그동안 정치 검찰 때문에 우리나라 정의가 많이 훼손돼 왔다고 생각한다”라며 “검찰이 검찰이라는 조직을 위한 기관이 아닌 국민을 위한 기관으로 거듭나야 한다. 거기에는 민주적 통제장치가 강화돼야 한다”라고 밝혔다. 

 개요

대한민국 제19대 대통령.

부산에서 노동 및 인권 변호사로 활동하다가 노무현 대통령의 참여정부  대통령비서실 민정수석, 시민사회수석을 거쳐 마지막 대통령비서실장을 지냈다.

제18대 대통령 선거 민주통합당 후보로 출마하였으나, 진보진영 단일화(이정희 통합진보당 후보 사퇴)에도 불구하고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에게 패배했다. 이후 대선 패배의 책임으로 자숙하며 지내다 2015년 2월 8일 새정치민주연합 전당대회에서 당대표에 당선되면서 정치적 재기에 성공한다.

2017년 3월 10일 최순실 게이트가 원인이 되어 박근혜 대통령이 탄핵된 후, 조기 대선으로 치루어진 제19대 대통령 선거에 더불어민주당 소속으로 출마하여 41.1%의 득표율로 자유한국당 홍준표 후보를 누르고 대한민국 제19대 대통령직에 올랐다.

 

약력

1953년 1월 24일 경상남도 거제시에서 아버지 문용형과 어머니 강한옥사이에서 장남(둘째)으로 태어났다.

문재인의 아버지는 대대로 이북 함경남도 흥남시 인근 남평 문씨 집성촌에서 살았고, 당시 명문이던 함흥농고를 졸업했다. 일제 강점기 당시 흥남시청에서 농업과장으로 근무하다가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흥남 철수  미군의 LST를 타고 아무것도 없이 무일푼으로 월남하였고, 문재인은 피난 중에 경상남도 거제시에서 태어났다.

문재인이 태어났을 때 아버지는 북한에서 공무원 생활을 하다가 공산당에게 너무도 시달렸기 때문에 "공무원 생활은 절대 하지 않겠다"면서 거제도 포로 수용소에서 노무자로 일했다. 어머니는 거리에 나가 계란 행상으로 가계를 꾸렸다. 그러다가 어느 정도 의식주 문제가 개선되자, 문재인의 부모님은 문재인을 초등학교에 보낼 겸 부산 영도구로 이사하고 문재인은 남항국민학교에 입학한다.

부산에서 아버지 문용형 씨는 처음에 양말을 떼다 판매상에게 공급하는 사업을 벌렸으나, 결국 사업에는 실패하고 빚만 졌다고 한다. 그래서 문재인이 어린 시절 어머니가 실질적으로 생계를 책임져야 했는데, 구호물자로 얻은 옷가지를 파는 좌판이나 연탄배달 소매상 등을 하면서 가난하게 살았다고 한다. 그래서, 문재인은 훗날 "집에 자전거를 살 만한 형편이 아니어서 지금도 자전거를 타지 못한다."라고 밝혔다. 그래서 2012년 SBS 힐링캠프에 출연했을 때 제작진이 문재인에게 보조바퀴가 달린 자전거를 선물로 주었다.

국민학교 시절 학교에 매달 내야 하는 '월사금'을 못 내서 담임이 집에 가서 받아오라고 하면 그냥 같이 못 낸 친구들과 바닷가에 가서 놀다가 학교 마칠 때 시간 맞춰서 교실로 되돌아갔다고 한다. 동네 성당에서 나눠주는 전지 분유를 배급 받은 고마움에 어머니가 먼저 세례성사를 받아 천주교 신자가 되었고, 문재인 본인도 부모의 영향으로 초등학교 3학년 때 부산 영도구에 있는 천주교 부산교구 신선성당에서 세례를 받아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 문재인의 세례명 티모테오다.

1965년 부산 남항국민학교를 졸업했고, 당시 지역의 명문이었던 경남중학교에 입학했다. 중학교 때 학교 도서관에 가는 것을 좋아해서 닥치는 대로 책을 읽고 시간이 날 때마다 학교 도서관에 가거나 책을 대출 받아 읽는 일을 고등학교 마칠 때까지 계속 했다고 한다. 문재인 본인의 증언에 따르면 이 당시 애독서는 삼국지 사상계였는데 특히 삼국지에서는 박종화, 김구용, 정비석등의 삼국지 판본을 다 섭렵하면서 역사와 대의명분에 대한 중요성을 느꼈다고 한다. 존경하는 인물은 '대의명분의 사나이' 관우라고 했고, 유비가 10만 군중을 이끌던 에피소드를 들어 유비가 실은 굉장히 강한 사람이라는 평가를 내리기도 했다.

1968년 경남중학교를 졸업한 이후, 그 당시 PK 지역 최고의 명문고로 꼽혔던 경남고등학교에 수석으로 입학하였다. 고교 시절 초기에는 학내에서 '문과에 문재인, 이과에 승효상'이란 말이 있을 정도로 학업에서 두각을 나타냈지만, 가난한 가정 환경에 낙망, 술·담배에도 손을 대며 방황의 시절을 보냈다. 2학년 때는 같은 반 친구가 시험 중 답을 보여 달라고 해서 부탁을 들어줬는데 하필 답을 적은 종이가 교실을 한바탕 돌게 되면서, 보여준 문재인과 마지막에 본 학생 둘만 정학을 받기도 했다. 3학년 때는 축구 시합 후 친구들과 학교 뒷산에서 술과 담배를 하다가 당직 교사에게 걸려서 유기 정학을 당하기도 했었다. 결국 이런 방황으로 서울대 입시에 실패하였다.

학창 시절 친구들과의 일화는 유명하고, 지금도 자주 만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소아마비 때문에 다리가 불편한 친구를 업고 소풍 장소까지 갔던 고교 시절의 일화 등으로 미루어 볼 때, 학창시절 인정 많고 바른 성품을 지닌 학생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문재인은 중·고교 내내 이 친구의 가방을 대신 들고 등·하교를 했는데 "늦었으니까 먼저 가라"는 말에도 가지 않아 항상 같이 지각했다고 한다. 훗날 이 친구는 서울대 법대를 졸업했으나, 집안 사정상 사법시험 공부를 그만두고 사업을 했다가 크게 실패했다. 그러자 문재인은 이 친구에게 고시원비, 새 책값, 용돈 등 모든 비용을 대주며 사법고시를 권유했다. 그 친구는 2년 만에 사법시험에 합격해서 판사가 되었는데 그가 바로 인천지법 부장판사를 맡다 퇴직한 김정학 판사다. 더 자세한 기사

여담으로 2012년 대선 때 NLL 관련 발언 등으로 인해 정적 관계에 있다고 할 수 있는 자유한국당 김무성 의원은 문재인 경남중학교 1년 선후배 사이인데, 두 사람은 각각 새정치민주연합 새누리당의 대표이던 시절에 재경지역 경남중고 합동 동문회에 참석하여 옆자리에 나란히 앉기도 했다. 이 때문인지 사적으로는 친한 50년 지기 사이라고 한다. 정치인들 초대를 꽤 자제했던 김무성 딸의 결혼식에 문재인이 오자 놀랍게도 김무성이 문재인 있는 곳으로 찾아가서 "어, 문재인이 왔나? 고맙다."라고 환영했다는 것은 꽤 유명한 일화다. 당시 김무성의 주변 사람들도 꽤 놀랐다고 한다. 물론, 문재인은 정치적인 입장을 떠나서 순수하게 신부의 아버지의 지인으로서 간 것이었다.

대학 시절, 군 복무 및 사법시험

국민과의 대화 문재인 지지율 문재인 고향 문재인 모친 문재인 임기 문재인 대통령 문재인 아들 문재인 가족관계 문재인 딸 김정숙 노무현 문재인 한자 문재인 북한 이낙연 문재인 아버지 박근혜 문재인 어머니 문재인 귀국 문재인 나이

서울대에 낙방하고 1971년 종로학원 진입 시험에서 1등을 하면서 학원비를 면제받고 재수를 시작했지만, 재수 이후에도 서울대에 낙방하고 후기로 1972년에 경희대학교 법학과에 문과 수석을 차지하면서 4년 장학생으로 입학했다. 보통 당시 서울법대에 낙방한 학생들은 차선으로 후기의 성균관대 법대를 선택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문재인은 특이하게 경희대를 선택했다. 4년 장학금도 이유였겠지만 그보다도 설립자 조영식 박사가 문재인의 아버지처럼 같은 실향민이라는 것에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경희대에 입학하면서 같은 학교를 다니던, 훗날 아내가 되는 김정숙을 만났다. 학교 축제 파트너로 처음 만났는데 김 여사가 알랭 들롱 닮은 사람 소개 시켜준다는 친구 오빠 말을 듣고 혹해서 만나게 되었다고. 그런데 이 때 남들이 첫 인상이 상당히 촌스러워서(...) 김 여사가 실망했다고 한다. 이때만 해도 오고 가다 만나면 인사하는 사이, 요새 말로 썸 타는 사이였다. 그러던 어느 날 시위를 이끌던 중 응축된 최루가스를 직격으로 맞아 기절했는데 이때 김 여사가 직접 간호해주면서 사이가 깊어졌다. 쓰러져 있다가 눈을 떠보니 아내가 물수건으로 얼굴을 닦고 있었다고.

3학년 재학 시절 재밌는 일화가 하나 있다. 당시 문재인은 유신 헌법 반대 시위를 하면서 사법 고시를 준비하던 법학과 동기들에게도 열심히 시위 동참을 호소했는데, 법대 동기였던 고조흥이 "우리는 너와 생각이 다르다"며 쫓아냈다고 한다. 하지만 얼마 안 가 치른 사시 1차 합격자는 고시반에서 공부 안 하고 민주화 운동을 했던 문재인 혼자 뿐이었다는 반전이 있었다(...) 이 이야기는 경희대의 전설이 된다. 훗날 고조흥은 문재인이 군 생활을 하는 동안 먼저 검사 등 법조계 경력을 쌓기 시작하면서 후에 한나라당 후보로 재보궐선거에 당선되면서 18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국회의원이던 시절에, 공직 채용 시험 때 군가산점제를 주는 병역법 개정안을 발의한 적이 있었다. 

경희대학교 4학년 총학생회 총무부장으로서 유신 독재에 반대하는 집회를 주도했다가 1975년 4월 11일 집회 때 구속되어 징역 8개월, 집행유예 1년을 선고 받고 풀려났지만 대학에서 제적당했다. 이후 군에 입대했는데 육군 제39보병사단 신병훈련소에서 신병교육을 받은 뒤 특전사로 차출되어 특전사 제1공수특전여단 제3특전대대 대대본부 작전과에서 복무하였다. 이때 사령관이 정병주 장군, 여단장이 전두환, 대대장이 장세동이었는데 훗날 일어나는 12.12 군사반란에서 이들의 운명이 어떻게 되는지, 그리고 이들 밑에서 일반 사병으로 복무했던 문재인의 미래를 돌이켜 보면 역사란 참으로 아이러니하다고 할 수 있다.



항간에서는 문재인이 대대본부 작전과에서 행정병으로 복무한 거니까 꿀을 빤 거 아니냐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그 당시의 특전사에선 장교, 부사관뿐만 아니라 특전병들 중 특전대대에 배치된 일부 인원은 여러 훈련들을 모두 똑같이 받았고, 특히 특전여단들을 계속 새로 창설하면서 전체 특전사 인원의 대폭 증가가 이루어졌던 1970년대 중반경부터는 특전병이 전투인원으로 편제되던 시절도 있었다. 문재인도 팀 소속은 아니었지만 대대본부에 근무하며 기본적인 훈련을 받았다. 특전사에서 주특기가 폭파였고, 심지어 수중침투훈련인 스쿠버 훈련까지 자원해서 받았다. 참고로, 현재 특전사에서 폭파 주특기는 오직 간부만 가능한 주특기다. 전투 지원 및 행정 업무만 하는 지금의 특전병도 특수전 훈련이 아닌 다른 훈련들(공수 훈련 등)은 받는다. 물론, 특전사의 주력인 특전사 간부들보다는 훨씬 수월한 것은 맞다. 그런데, 문재인은 1970년대에 특전사로 복무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1976년 제1공수특전여단에서 고급인명구조 교육 수료, 1977년 대대 스쿠바 교육 이수, 자대 작전과 행정병 근무 시 48회의 강하훈련 등의 훈련 경력을 가지고 있다. 함께 복무한 후임의 이야기에 따르면 강하훈련을 배정하는 업무를 수행하면서 '먼저 뛰고 넣어야' 불만을 적게 들어서 강하횟수가 많을 수밖에 없었으며, 강하를 즐겼던 문재인은 동료 행정병들 대신 뛰어주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이 횟수는 월계 공수휘장에 해당할 정도인데 이는 복무기간이 짧은 현재의 특전병들 사이에서는 매우 드문 기록이다.


특전사 시절 고급인명구조원 강습을 수료해 받은 수료증. 대한적십자사 페이스북을 통해 공개했다.

군 복무 중에는 당시 특전사 사령관이었던 정병주 장군과 여단장이었던 전두환으로부터 2차례의 최우수 특전사 표창을 받기도 했다.

당시 문재인과 같은 부대에서 교육장교로 있었던 노창남 예비역 대령의 회고에 따르면, 문재인이 이등병이었던 시절 폭파 과정 훈련에서 최우수자로 선정됐는데 특전사 장교, 부사관 등 직업 군인 위주로 돌아가기 때문에 당연히 이들이 성적 우수자로 선발되는 게 일반적이었다고 한다. 따라서 일반 사병이, 그것도 가장 낮은 계급의 이등병이 성적 최우수자로 상을 받는 일은 전례가 없었던 일이라고 한다.# 이렇게 군 생활을 모범적으로 잘 했기 때문에, 전역할 때 간부들이 "군대에 말뚝을 박으라"면서 강하게 권유했다는 후문이 전해진다.

문재인이 특전사 복무 중이던 1976년 8월에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이 벌어졌고, 이 때 미루나무 제거 작전에 보복작전팀으로 문재인이 복무하던 제1공수특전여단 대원들이 투입되었다. 다만 일부 나도는 소문과는 달리 문재인은 직접 보복작전을 하던 '현장팀'이 아니라, 부대에서 현장의 작전 진행상황을 수집/보고/감독하던 '작전상황팀' 소속이었다.# (판문점의 보복 작전 현장에 직접 투입된 것은 특전사의 '장교'와 '부사관'들이었다.)

이러한 특전사 복무 경력과 일부 정치인들의 병역 비리 의혹이 대비되면서, 군 복무가 아킬레스건이 아니라 되려 메리트로 작용하는 몇 안 되는 정치인이 되었다. 특히 2016년 10월 송민순  외교부 장관 회고록 파문이 터지자, 일부 보수세력들은 문재인을 향해 색깔론 공세를 펼쳤는데, 문재인은 이를 두고 "군대도 안 갔다온 사람들이 걸핏하면 종북 타령이냐?"라면서 국가안보를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보수 진영에서는 정작 군 복무를 면제받은 사람들이 제법 많다는 사실을 꼬집기도 했다.

당시 그가 특전사 예하 제3대대에 배치받았을 때 '시위하다 온 애', '교도소에 있다 온 놈'이라는 전력 때문에 대대본부 예하의 각 부서에선 그를 기피하는 분위기가 있었다고 한다. (이때는 아직 '운동권'이라는 단어가 없었다.) 그러자, 대대 인사과에서는 이러한 사정을 몰랐던 작전과 교육계한테 "똑똑한 놈이 새로 왔다"며 설득하여, 대대 본부 작전과에 문재인을 배치시켰다. 배치 받은 후에야 다른 장교들에게 문재인 신병이 '시위하다 온 애'라는 사실을 들은 교육장교 노창남 당시 중위는 다음 날 인사과장에게 항의했지만, 이미 버스는 떠난 상태였다고 한다

문재인이 속해있던 제3특전대대 본부 작전과에서 같이 근무했던 노창남 예비역 대령은 2012년 18대 대선 당시에 문재인과 같이 군 복무했던 사람들을 비롯해 문재인을 지지하는 특전사 출신 700여 명을 모아 '문재인과 특전사 전우들의 모임'을 결성하고 문재인 후보 지지 선언을 했다.# 그리고 노 대령은 2015년 새정치민주연합의 새 당대표를 뽑는 2.8 전당대회가 열렸을 때에도 문재인 지지를 호소하는 글을 새정치민주연합 대의원들에게 보내기도 했다.

군시절 생활에 대한 증언들을 보면 장교, 부사관, 선후임 동기 모두 입을 모아 문재인은 한번도 후임을 때린적이 없다고 한다. "언제 어디서 만날지 모르는게 운명인데 우리는 후임을 때리지 말자"고 동기들을 설득했다고 한다. 심지어는 선임이 문재인을 빠따로 치고 "이제 네가 후임들을 때리라"고 가버렸는데 문재인은 자기만 맞고 한번도 후임을 때리지 않았다고 한다. 정말 때려야 할 때면 소리만 크게 나도록 엎드려 뻗쳐를 시킨 다음 군화 밑바닥을 빠따로 쳤다고 한다. 그 뒤 후임들에게는 구타 악습이 없어졌다고 한다

1978년에 전역하고 고향으로 되돌아와서, 진로 문제를 고민하다가, 아버지가 심장마비로 숨을 거두었다. 아버지가 살아계실 때 자신이 잘되는 모습을 하나도 보여주지 못했다는 자책감이 든 문재인은 이를 계기로 사법시험에 매달리기로 결심하고 전라남도 해남군에 있는 대흥사 암자로 가서 공부에 몰두했다.

그다음해 1979년 사법시험에 2번째로 1차 합격하였다. 단, 준비 소홀로 2차는 다음 해로 목표를 정했다. 그런데 그때 부마항쟁이 시작돼 다음해 80년에는 학교와 복학 논의가 시작되면서 뜻하지 않게 복학생 대표가 되었다. 1980년 복학하면서 4월 학내 시위 와중에 사법시험 2차 시험을 치렀을 무렵, 전두환이 이끄는 신군부 세력은 1980년 5월 17일 24시 비상 계엄을 전국으로 확대 발표하고 민주화 운동 전력이 있는 대학생 등 반정부 인사들이 '계엄포고령'을 위반했다면서 마구잡이로 구속했다.

그래서 문재인도 5월 17일 저녁 강화도 예비 처가에 다녀오는 길에 잡혀 또 구속됐다.이런 사유로 5.18 광주 민주화 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에 따라 실제로 국가유공자 자격을 받을 수도 있었지만 받지 않았다.구속된 지 1달이 지나는 중 80년 제22회 사법시험에 2차 합격했다. 보통은 1차 합격을 하면 2차 시험을 위해 총력을 다해 매달리는데 문재인은 민주화 운동을 하면서도 사법시험 공부까지 병행해서 합격한 것이다.

2차 합격 소식을 당시 여자친구였던 김정숙 여사가 직접 유치장으로 면회를 와서 알려줬다고 한다. 그리고, 대학 관계자들이 면회를 와서 합격 소식을 전하자 구치소 직원들과 안기부 직원들의 태도가 순식간에 바뀌었다고 한다. 계속 반말을 하던 사람들이, 어느 날 아침에 갑자기 문재인을 보고 "영감님"이라고 부르며 유치장 밖으로는 못 나가니까 학교 관계자나 면회객을 유치장 안에 들어가게 해서 축하주를 마시게도 해줬다고 한다.

그해 경희대 출신이 시험에 합격한 사람이 2명이라다급해진 대학 측은 총력을 기울여 구명 노력을 펼쳐서, 며칠 후 석방되었다. 이후 3차 면접 직전에 안기부에서 그를 호텔로 불러 "지금도 생각이 그때와 같은가?" 라고 사실상의 전향 의사를 타진했지만합격 취소를 각오하고 “그때 나의 행동이 잘못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훗날 썰전에서 이 3차 면접 때 "안기부로부터 전향 요구를 받았을 때, 솔직히 마음이 흔들렸지만, 그렇다고 그 손을 덥석 잡아버리자니 너무도 굴욕적으로 느껴져서 거부한 것"이라고 회고했다. 그리고 호텔 밖으로 나와서 후회했다고 한다. 사실 사법시험 합격자가 귀한 경희대의 구명 노력과 당시 전두환 정권의 일시적인 유화책 실시라는 행운이 겹쳐 불합격이라는 불행은 면했지만, 소신을 지키려고 몇 년 간의 공부를 도로아미타불로 만들 수 있었던 셈인데, 후회하는 마음이 들었던 것도 인간적으로 이해가 갈 만한 부분이 아닐는지. 다행히 그해에는 3차 면접에서 아무도 떨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다만, 그 다음해부터 민주화 운동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예외 없이 3차에서 탈락했다고 한다.

국민과의 대화 문재인 지지율 문재인 고향 문재인 모친 문재인 임기 문재인 대통령 문재인 아들 문재인 가족관계 문재인 딸 김정숙 노무현 문재인 한자 문재인 북한 이낙연 문재인 아버지 박근혜 문재인 어머니 문재인 귀국 문재인 나이

인권 변호사 시절

사법연수원 12기 출신으로, 조영래 변호사, 박원순 서울시장, 고승덕 변호사와 사법연수원 동기다. 결혼을 하고 아버지가 된 것도 이 시절. 성적은 수석이었지만, 시위 전력 때문에 차석 졸업 대한민국 법무부장관상을 받았고 집시법 위반 전력이 있는 이유로 판사로 임용되지도 못했다. 판사 임용이 좌절되고 거대 로펌의 제의도 있었지만 문재인은 어머니가 계신 부산으로 낙향했다.

이때 연수원 동기인 박정규 노무현 변호사를 소개 해주었고의기투합한 둘은 '변호사 노무현 문재인 합동법률사무소'를 열었다. 이후 노무현과 더불어 부산의 대표적인 재야 인권변호사로 활동하기 시작한다.



당시 노무현 문재인 합동법률사무소의 명함.도로명주소 부산광역시 서구 임시수도기념로 11-7이며, 현재 이 자리에는 PC방과 노래방이 들어서 있다. 지금은 부산지방법원, 부산지방검찰청 등의 이전으로 인해 인근에 있는 부산법조타운으로 이전한 상태.

처음부터 인권변호사의 길을 걸으려고 한 건 아니었다고 한다. 사무소로 찾아오는 사람들을 마다하지 않고 만나다 보니 차츰 부울경 지역에서 대표적인 노동 및 인권변호사가 되어 있었던 것이라고. 그리고 1985년 '부산민주시민협의회'(약칭 부민협)이 설립되면서 부산 민주화 운동의 구심체가 마련되었고 노무현 변호사와 문재인 변호사는 33인의 대표 발기인으로 들어갔고, 부민협의 상임위원으로 활동하였다. 이 후 3년 동안 300여건 이상의 소송에서 70%대의 승소율을 자랑했다.

1987년 6월 민주항쟁 때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약칭 국본)가 결성되었는데, 부산 국본의 상임집행위원장이 노무현 변호사였고 상임집행위원이 문재인이었다. 이 둘은 당시 박정희가 만들고 전두환이 계승한 통일주체국민회의하의 대통령 간선제를 국민 투표에 의하여 대통령을 뽑는 직선제로 바꾸기 위한 민주화 운동을 했다.

6월 항쟁을 통해 민주화가 이루어진 뒤에 치러진 13대 대선에서 개표방송을 지켜보다가 노태우가 당선되는 것을 보고 스트레스를 받아 약 3주 정도 몸살을 앓고 나서 머리카락이 하얗게 샜다고 하며, 1988년 13대 총선을 앞두고 김영삼 당시 통일민주당 총재에게 노무현과 함께 국회의원 공천 제안을 받게 되었다. 노무현은 이 제안을 받아들여 통일민주당 후보로 부산 동구에서 당선, 13대 국회의원이 되어 정계에 입문하였지만, 문재인은 거절하였다고 한다. 그렇게 재야에 남은 문재인은 꾸준히 젊은 변호사들을 영입하여 법률사무소 이름을 '법무법인 부산'으로 바꾸고 대표 변호사를 지냈다.

부산 대표 인권 변호사였던 만큼 1988년 12월 10일 발행한 국민일보 1호에서 ‘인권변호사 문재인씨’로 소개되기도 했다. 유엔 세계인권선언 40주년에 창간한 국민일보가 한국 인권운동 특집으로 계획된 인터뷰였다. 국민일보는 당시 문재인 변호사를 승소율 70%를 자랑하는 능력있는 변호사이자, 민주 노조의 산파라고 소개했다. 당시 인터뷰에서 “노동 현장의 인권유린을 참을 수 없다”고 성토했다.*

최동원 선수의 부탁으로 선수협 고문변호사로 활약하기도 했다. 이 이야기는 2016년 부산 촛불집회에서 본인이 다시 언급하기도. 문재인의 야구 사랑에 대해서 쓴 기사. 한겨레신문 부산 지사 설립을 위해 변호사 신용 대출로 빌린 2억을 쾌척해 주었으며, 한겨레신문의 창간위원과 부산 지사장을 맡기도 했다. 이 돈은 지금까지도 받지 않고 있다.

이 당시에 비디오 게임에도 일가견이 있어서, 젤다의 전설 영문판 대사를 아들에게 번역해줬다.

1990년 부산 엄궁동 2인조 살인사건의 변호를 맡은 적이 있으며, 2016년 그것이 알고싶다에서 해당 사건을 다룰 때 출연해 인터뷰를 하였다. 그는 "사건의 여러 정황상 용의자들이 무죄라고 확신했지만, 누명을 벗겨주는 데 실패했다"며 본인의 35년 변호사 인생에서 가장 안타깝고 한이 남은 사건이라고 회고했다. 참고로 이 시기는 노태우 정권이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해 많은 범죄가 일소되었지만, 그만큼 대한민국 경찰청, 대한민국 검찰청 등 우리나라 사정 기관들이 실적 올리기에 눈이 돌아가 있던 시기라 애꿎은 사람들이 사소한 트집 하나 때문에 범죄자로 몰려 수없이 체포되었고, 고문 수사 및 진술 강요 역시 만연했던 시기이기도 했다.

1992년 12월 포항제철에서 노동 운동을 하다 해고된 노동자 이건기 씨는 당시 문재인 변호사에게 도움을 청했다. 이건기 씨의 변호를 맡기로 한 문재인 변호팀은 해고무효확인 소송에서 경주지법에서 열린 1심부터 대법원에서 열린 3심까지 모두 승소를 이끌어냈고 덕분에 이건기 씨는 불가능해 보였던 복직에 성공하게 된다. 이때의 인연으로 이건기 씨는 문재인 변호사가 훗날 정치인이 돼 2012년 18대 대선에 출마했을 때 새누리당의 초강세 지역이었던 경상북도를 누비며 문 후보의 선거를 도왔다고 한다.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 기간 중이었던 2017년 3월 28일에는 이 복직 일화를 본인 페이스북에 공개하며 문재인 후보를 지지해줄 것을 호소하였다.# 페이스북 원문

잘 알려진 사실은 아니지만 1990년에 특별검사로 임명되어 활동한 적이 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공소유지담당변호사'로 1988년 도입된 제도로 특별검사와 유사한 성격으로, 언론 등에서는 특별검사로 불린다. 고소고발인의 재정신청 사건에서 못미더운 검사를 대신하는 역할로, 법원이 임명한다. 이 사건은 1987년에 부산항에서 건강 매트리스를 밀수하다가 적발된 박명률이란 인물이 당시 세관원이었던 임흥우와 양현배 등 3명에게 붙잡혀 물고문을 당해 자백했다고 재정신청을 낸 이른바 부산 세관의 고문세관원 재정신청사건으로 문재인은 이 사건에서 박윤성 변호사와 함께 공소유지 담당변호사로 활동했다. 한 사건에 2명이 지정된 것은 역사상 처음이였다고한다.

1996년에는 페스카마호 선상 살인 사건의 주범들을 변호했었다. 2012년 18대 대선 당시 이것으로 공격을 받은 적이 있었는데 그때 문재인 후보는 본인이 이 사건을 담당했던 것을 흑역사로 여기거나 변명하지 않았다. 사건 항목에 서술된 주석의 내용을 빌리자면, 변호사 윤리 규칙 제19조 제1항엔 "변호사는 의뢰인이나 사건의 내용이 사회 일반으로부터 비난을 받는다는 이유만으로 수임을 거절하여서는 아니 된다"는 규정이 있다고 한다.

즉, 아무리 흉악한 범죄자라 하더라도 형사 절차에서 최소한의 절차적 기본권은 보장받아야 하는 것이 법치주의의 정신이며, 이를 조력하는 것은 변호사의 당연한 사명이라는 것이다. 특히 인권 변호사라면 더더욱 그렇다. 애초에 이런 사건의 변호는 흔히 생각하듯 피고인의 무죄를 주장하는 게 아니라 법에 따라 적절한 선에서 처벌을 받도록 조율하는 것이라 논란거리가 될 만한 일이 아니라는 반론이 존재한다.

2000년에는 미쯔비시 중공업을 대상으로 군함도 강제징용에 대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해서 미쯔비시를 패소시킨 적이 있다. 1심과 2심에서는 기각이 되었지만 대법원에서 원심을 파기하고 부산고등법원으로 돌려보냈고 부산고법에서는 원고들에게 각각 1억 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하지만 미쯔비시 중공업은 이에 불복하고 상고하여 현재 대법원에서 계류 중이다.

이후 부산에서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 부산 지부와 경남 지부장을 역임하며 꾸준히 시민사회 활동을 하였다.

더불어민주당의 유력한 대선 주자로 떠오른 2016년에는 대선 준비를 위한 비용(사무실 임대료 등)을 마련하기 위해 가지고 있던 '법무법인 부산'의 지분(22.56%)을 처분(8,370만 원)하였다고 한다.

제16대 대통령 선거

2002년 4월 노무현이 새천년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을 통해 대선후보로 확정된 이후, 노무현은 문재인에게 그 해 6월 열리는 제3회 지방선거에서 부산시장으로 출마할 것을 권유하였으나 문재인은 '나는 참모용' 이라며 거절했다. 노무현의 정치 입문 권유를 거절하던 문재인은 그 후 변호사 일에만 열중하다 2002년 10월 노무현의 대선 캠프 '국민참여운동본부' 부산 지역 본부 선대위원장을 맡아 노무현의 당선에 기여했다. 그 유명한 '문재인을 친구로 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는 노무현의 발언이 여기서 나온 것.

저는 제가 아주 존경하는 나이는 저보다 적은 아주 믿음직한 친구 문재인이를 제 친구로 둔것을 정말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나는 대통령감이 됩니다. 나는 문재인을 친구로 두고 있습니다.


2002년 당시 노무현 대선 후보


부산 지역 본부장을 맡으며 희망저금통 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고, 12월부터는 추미애 당시 민주당 선대위원장과 함께 전국 유세에 동행했다. 대선 당일에는 부산지역 캠프에서 선거상황을 지휘했다.

국민과의 대화 문재인 지지율 문재인 고향 문재인 모친 문재인 임기 문재인 대통령 문재인 아들 문재인 가족관계 문재인 딸 김정숙 노무현 문재인 한자 문재인 북한 이낙연 문재인 아버지 박근혜 문재인 어머니 문재인 귀국 문재인 나이

 정치 활동

정치인의 정의가 정무직공무원 정당인이므로, 특별한 정치 활동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정무직공무원인 민정수석비서관 시절부터 정치 활동으로 분류한다.

 참여정부



청와대 민정수석비서관 내정 문재인 변호사

청와대에서 일하던 시기에는 부정 청탁을 받지 않기 위해 친구를 만나지 않았고, 아내에게도 백화점 출입을 금했다고 한다. 또한 "고위공직자 부인들 사이의 교류에도 신중에 신중을 기하라"는 당부도 잊지 않았다고. 그것뿐만 아니라 아예 동창회에 얼굴을 비추지도 않았고, 고등학교 동창인 고위 공직자가 문재인의 방에 들렀다가 얼굴도 못 본 채 쫓겨난 적도 있으며, 또한 청와대 출입기자단과 단 한 차례의 식사나 환담 자리도 갖지 않았다고 한다. SBS 힐링캠프에 출연했을 때는, 영부인 김정숙 여사가 아파트를 마련하기 위해 주택청약저축을 들었는데 그 사실을 알게 된 남편 문재인이 "주택청약저축은 집이 없는 사람들을 위한 것인데, 우리 가족은 집이 있으니 해당되지 않는다. 해약하라."고 했다는 일화가 소개되었다. 여담으로, 이때 아내는 면박을 듣고 너무 화가 나서 속으로 "니가 나중에 얼마나 잘 되나 보자!"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리고 2017년 영부인이 되었다.

 대통령비서실 민정수석비서관

2003. - 2004.02.

2002년 대선이 끝난 뒤 문재인은 다시 변호사 업무에 복귀하려 했으나, 노무현 대통령의 제안으로 2003년 2월부터 2004년 2월까지 참여정부 초대 민정수석비서관에 임명됐다. 대한민국 제5공화국 전두환 정권에서 육사 출신 이학봉, 김용갑과 사정수석비서관 허삼수 이후 첫 비검사 출신 민정수석이었다. 민정수석으로 지내면서 국정원, 검찰 개혁에 꽤 많은 공을 들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청와대 직원들에게는 늘 존댓말을 썼다고 한다. 자신의 주장을 내세우기보다 다양한 의견을 듣고 상황을 명확하게 정리하는 업무 스타일이었다.

그러나 녹내장과 고혈압으로 인한 건강 악화, 그리고 열린우리당의 총선 출마 압력 등 여러가지 이유로 인해 공직 생활에 회의를 느꼈고, 이에 1년 만에 청와대를 떠난다.

휴식기

그렇게 민정수석을 그만두고 네팔에서 트레킹을 하던 중 연락이 두절된 상황에서 영자 신문을 통해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탄핵 소추안 통과 소식을 알게 된다. 문재인은 즉시 귀국하여 변호인단을 꾸려 노무현 대통령의 변호인 자격으로 탄핵사건에 임한다. 두 달간의 공방 끝에 결국 탄핵 소추안은 기각되었다.

대통령비서실 시민사회수석비서관

2004.05. - 2005.01.

탄핵 정국이 끝나고 노무현 대통령이 대통령 업무에 복귀한 직후 문재인은 청와대 시민사회수석비서관으로 임명되어 청와대에 복귀하게 된다. 그 후 다시 민정수석을 거치면서 왕수석으로 불렸던 적이 있으며, 참여정부 말기에는 청와대 비서실장을 맡게 되면서 참여정부 시절 대부분을 청와대에서 보내게 된다.수석비서관으로 활동하다가 천정배 법무부장관의 후임으로 갈 뻔했으나, 여야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대통령비서실 민정수석비서관

2005.01. - 2006.05.

2006년 부산 지역 기자들과 만나 "대통령도 부산 출신인데 부산 시민들이 왜 (참여정부를) 부산 정권으로 안 받아들이는지 이해가 안 된다. 한 지역에서 한 정당이 지방선거를 독점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열린우리당 새천년민주당의 통합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이 대통령의 의지"라고 한 발언에 대해 한나라당 대변인은 "지역감정 조장 발언"이라면서 "선거법 위반 여부를 조사해야 된다"고 주장했고, 새천년민주당 대변인은 노무현 정부가 국민과 호남인을 대상으로 사기극을 펼치고 있다고 주장하는 등 논란을 일으킨 적이 있다.

민정수석으로 일하던 시절, 당시 참여정부 실세였던 이해찬 국무총리가 골프로 인해 구설수에 휘말리자 어떻게 조치할 것인가를 두고 고민하던 노무현 대통령에게 해임하라고 촉구하기도 했으며, 문희상 당시 대통령 비서실장의 매제가 경찰청장 후보에 오르자 '대통령 비서실장의 매제가 경찰청장이 되면 국민들이 어찌 납득하겠냐'며 반대했다.* 그리고 고위 공직자 후보 검증을 담당하는 민정수석으로 일하면서 총 35명의 검증을 맡았는데 이 중 단 1명만 낙마했다. 청문보고서가 채택이 불발되거나 부적격 의견이 포함된 인사도 고작 4명.

정봉주 전 민주당 의원이 소개한 일화에 따르면, 사학법 문제로 교육위 의원, 교육부 장관, 청와대 교육수석이 청와대에 모여 '당*정*청 회의'를 열었는데 교육부 장관이 "나의 제안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사표를 내겠다"며 강수를 두었다. 그러자 당시 회의의 일원이었던 문재인이 회의 내내 가만히 듣고 있다가 "그럼 관두시죠"라며 일침을 가했다고 한다. 국가 정책을 조율하는 데 자신의 자리를 압박 수단으로 사용할 거라면 관두라는 뜻이었다고.

 대통령비서실장

2007.03. - 2008.02.

2007년 일본 정부 우토로 마을의 도시화, 개발 & 정비 사업을 한다는 명목으로 마을을 철거하려고 했을 때 당시 문재인 대통령 비서실장은 그 소식을 접하고 정부 예산 30억 원을 우토로 마을에 지원하도록 도와 마을 부지 6,000평 중 2,000평을 매입할 수 있게 해서 우토로 마을 주민들이 거주권을 확보할 수 있도록 하는 데 일조했다. 그로부터 5년 뒤인 2012년 우토로 마을 주민회는 도움의 손길을 내민 사람들에게 감사의 뜻을 전하면서 당시 참여정부의 지원에도 감사하는 마음을 담아 문재인 측에게도 감사패를 전달했다.

문재인 전 대표와 절친한 관계로 알려진 노영민 전 의원은 충청북도의 지역 언론인 '충북인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참여정부 시절 전체 국정 현안 중의 95%는 문재인 당시 청와대 비서실장 선에서 처리됐다고 주장했다. 노 전 의원의 발언에 따르면 정부 부처끼리 의견 조율이 끝내 안 돼 노무현 대통령에게까지 올라간 국정 현안은 5% 정도도 안 되었고 나머지 95%는 모두 문재인 비서실장 선에서 매듭이 지어졌다고 한다. 그래서 문재인 전 대표가 차기 대권을 잡는다면 국정 현안을 파악하기 위해 불필요한 시간 낭비를 할 일은 없을 것이라고 전망하기도 했다.

 

노무현의 죽음과 정계 입문

2008년 참여정부를 마치고 경상남도 양산시로 들어가 칩거하였다. 양산에서는 농사를 지으며 김정숙 여사와 어느 정도 행복한 생활을 했다고 회고했다. 가끔 노 전 대통령이 거주하던 봉하마을에 찾아가 농사일을 돕거나 담소를 나누기도 했었다.

그러다 2009년에 박연차 게이트 당시에 뇌물수수혐의로 노무현 전 대통령이 검찰 수사를 받게 되자, 변호사를 맡았으며 검찰청 수사에도 동행했다. 2009년 5월 23일 노무현 전 대통령은 결국 서거하였고, 문재인은 국민장에서 상주를 맡았다. 국민장에서 많은 시민들과 정치인, 권양숙 여사를 비롯한 유족들이 눈물을 흘리며 통곡하는 와중에도 끝까지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의연하게 대처하는 모습은 많은 사람들에게 감명을 주었고, 이 시기부터 정치 참여에 대한 이야기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주변에서 "정치판으로 나와 달라"고 사정을 했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그래서 "그럼 노무현에 대한 책이라도 한 권 내야 하지 않겠냐"고 해서 쓴 책이 <문재인의 운명>이었다. 이 책이 대박이 나고 "독자를 위해서 서울에서 북 콘서트 한번 열어야 하지 않겠냐"고 1회성으로 시작한 북 콘서트가 또 다시 대박이 나고, 결국 전국순회콘서트로 이어지고 결국 그를 정치로 나오게 만들었다고 한다. 참고로 이에 가장 크게 관여한 사람이, 바로 이해찬 국회의원.

2010년~2011년까지 한명숙 전 총리에 뒤를 이어 2대 노무현재단 이사장을 역임하며 노무현 시민학교 강의와 봉하마을 오리 쌀 사업 등 생전 노 전 대통령이 주로 했던 사업들을 주로 하며, 정치와는 거리를 두었다. 이 시기 노무현시민학교 강의에 자주 나오기도 했다.

제19대 국회의원

그렇게 정치와는 거리를 두다가 위에 서술한 것처럼 자서전 <운명>을 출판하고 그게 대박이 나면서 북콘서트가 시작되고 문재인은 야권의 유력 후보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초반에는 별 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다가 2011년 9월 문성근, 박원순 등과 함께 정치세력인 혁신과 통합을 창당하고 2011년 12월 국회의원 출마를 선언하고 정치에 뛰어들었다. 2012년 2월 민주통합당이 출범한 뒤에는 상임고문을 맡아 선거유세를 시작했다.

2012년 19대 총선에서 3당 합당 이후 보수 정당이 항상 강세를 보여왔던 부산광역시 사상구 민주통합당 후보로 출마해 55%의 득표율을 얻어 새누리당 손수조 후보(43.76%)를 제치고 당선되었다. 3당 합당 이후 사상구에서 당선된 첫 번째 민주당 후보이며, 19대 총선 당시 영남권 전체에서 단 3명뿐인 민주통합당 소속 당선인이었기도 하다.

2012년 4월 민주통합당 국회의원으로 당선된 뒤 노무현재단 이사장을 사임하고 상임이사로 직책을 바꿨다.

2012년 제18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면서도 의원직은 사퇴하지 않았고, 선거 패배 이후에는 의정 활동에만 전념했다.

2014년 여름 즈음에 부산에 수해가 발생했을 때 자신의 지역구인 부산 사상구를 찾아오지 않았다고 보수 진영이 비판한 적이 있다. 문재인 당시 의원은 이때 '유민 아빠' 김영오 씨의 단식 투쟁을 말리기 위해 본인도 단식 중이었는데, 이것을 두고 청해진해운 세월호 침몰 사고는 중요하고 자기 지역구는 안 중요하냐는 소리가 있었던 모양이다. 허나 이에 대해서는, 당시 사상구는 다른 지역에 비해 피해 규모가 미미한 편이었는데, 이는 사상구에서 하천 정비 사업 등 수해 방지 대책을 잘 세워놓은 덕분이었으며 문재인 의원은 사상구에서 진행 중인 사업의 중요성을 일일이 설명하고 예산을 삭감 없이 잘 지켜내어 힘을 보탰다는 반론이 있다.

좀 더 설명하자면, 사상구 바로 옆의 북구에서는 문자 그대로 수해가 할퀴고 간 피해를 입었으나, 사상구의 경우 백양산 운수천(계곡) 등산로 등이 일부 유실된 외에 지역 주민들의 생활 터전에서의 피해가 거의 없었다. 수해 이후에도 예산을 확보하고 추가적으로 우수관거를 정비하는 사업을 벌이고 교통개선사업 등을 함으로써 사상구청(새누리당 소속 구청장)과 사상구 국회의원(민주당 소속) 모두 수해로 인한 피해도 없고 사후 대처, 지역 현안 등을 잘 챙겼다는 평가를 들었다.

사람이 먼저다
사람이 먼저인 나라
새 시대를 여는 첫 대통령
국민후보


대선 당시 문재인 캠프의 슬로건


2012년 5월 노무현 전 대통령 3주기에서 출마 시사를 했고, 6월 17일 서대문 역사공원에서 제18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를 선언했다.

같은 해 9월 16일, 전국 13개 시*도 민주통합당 대선 후보 경선에서 정세균, 손학규, 김두관 후보를 상대로 13연승 전승을 거두고 대선 후보 경선에서 56%의 득표율을 얻어 민주통합당의 대선 후보로 선출되었다. 당시 민주통합당 대선 후보 경선 과정은 이 문서에서 다루고 있으니, 자세한 내용은 해당 문서를 참고할 것.

대선 후보 선출 이후, 용광로 선대위를 구성해 계파를 초월한 선거 캠프를 꾸릴 것을 천명했다. 캠프 명칭은 <담쟁이 캠프>. 도종환 시인의 시 <담쟁이>에서 따온 것이다. 당내 경선에서 패배한 다른 후보들과 당원, 대의원을 포괄해, 시민 사회와도 네트워크를 연결하는 캠프를 꾸린 셈. 경선에서 패배한 손학규 전 민주당 대표는 자신의 선거 캐치프레이즈 <저녁이 있는 삶>을 문재인에게 양보하기도 했다. 하지만 선거에 쓰이지는 않았다.

대선 후보 정책으로 '순환 출자 금지' 및 '출차총액제한제 재도입', '소상공인 특별법 제정' 등의 재벌 개혁, 경제민주화를 골자로, '고위공직자비리수사처 설치', '대검 중수부 폐지' 등의 검찰 개혁, '노인 장기 요양, 사회서비스 제도 충당', '보편적 반값등록금', '소득과 무관한 보편 의료비지원' 등의 복지 정책을 내세웠다. 또한 애묘인답게 정책공약집에는 심지어 반려 동물 권리를 위한 법안까지 있었다.

무소속으로 출마한 안철수와 함께 야권 후보 단일화를 놓고 지난한 협상을 벌였지만 단일화 방식이 계속 합의되지 않아 혹자에게는 1987년의 악몽이 재현되는 것 아니냐며 불안감을 조성하다가, 공개 TV 토론회 이후 2012년 11월 23일, 안철수가 예비 후보직에서 물러남으로 제18대 대통령 선거의 민주진영 단일후보로 출마했다.이 외에도 당시에 지지한 사람들은 아래와 같았다.

박근혜, 이정희와 3번의 대선 후보 TV 토론회를 벌였다. 1, 2회의 토론회에서는 강력한 데미지 딜러의 폭딜을 관전만 하며 존재감이 없다가, 박근혜 후보 떨어뜨리기 위해 나온 그 사람이 후보를 사퇴한 후에 벌어진 3차 토론회에서는 박근혜 후보와 1:1 토론을 벌였다. 이때 그 유명한 "그래서 대통령 되려고 하는 거 아니에요?"가 나왔다.

그렇게 박근혜와 1:1로 맡붙었지만 대통령 선거에서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에게 패해 2위로 낙선했다. 선거에는 패했지만, 역대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의 후보들 중 전 정당을 통틀어 2번째로 많은 14,692,632표(48.02%)를 득표했다.

작곡가 김형석이 캠페인 송 사람이 웃는다로 참여하기도 했다. 당시 문 후보의 정책 공약 '5개의 문, 단 하나의 문'에 감동 받아서 작곡했다고 알려져 있다. 대선 캠페인 송으로는 보기 힘든 고퀄을 자랑하나, 그닥 많이 알려지지도 않았고, 떠들썩한 유세차량에서 시끄럽게 나오는 캠페인 송에 비해 임팩트는 약했던 편. 이후 김형석은 2015년 더불어민주당에 입당했다.

2002년 대선 당시 노무현을 공개지지했던 故 신해철이 자신의 대표곡인 <그대에게>를 문재인 캠프에 캠페인 송으로 편곡까지 해서 음원을 캠프에 제공했다. 

2012 런던 올림픽과 대선을 앞두고 있었을 때 직접 유도복까지 입으면서 유도 국가대표 선수단을 만나서 격려한 적이 있었다.

대선 패배 이후 "대권 재도전은 없다" 라며 패배를 인정했고 23일 선대위 캠프를 해단시키고 2013년 초까지 칩거했다.

잠행 (2013-2014년)

이 시기 문재인은 대선 패배의 책임, 비노 세력의 등장으로 당 내에서 존재감이 거의 없던 시기라고 볼 수 있다. 국가정보원·국방부 여론조작 사건으로 인해 책임론은 점점 줄어들었으나 딱히 의견을 내지는 않다가, 6월 4일 엄정한 수사 촉구 성명, 10월 23일 “지금까지 드러난 사실만으로도 지난 대선은 불공정했다. 미리 알았든 몰랐든 박근혜 대통령은 그 수혜자”(#기사)라는 성명을 냈다. 그 외에는 의정 활동에만 전념하며 정치 생활을 하다가

2013년 11월 6일 남북정상회담 NLL 관련 기록 초본 삭제 관련하여 참고인 신분으로 조사를 받았다. 검찰청에 출두한 문재인은 "잡으라는 도둑은 안 잡고 신고한 사람을 처벌하는 꼴" 이라며 검찰 수사를 비판했고, "참여정부와 노무현 대통령은 NLL을 확실히 지켰다" 라고 밝히며 NLL에 관련된 새누리당의 주장은 사실이 아님을 확인시켰다.

2014년 3월 민주당 안철수 새정치연합이 합당하여 새정치민주연합이 출범하였는데, 당 대표는 김한길, 안철수 공동대표 체제로 가게 되었고, 문재인과 친노는 당내에서 주도권을 잡지 못한다.

2014년 4월 세월호 참사가 발생하고 이틀 후 팽목항을 찾았으며, 7월부터는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위해 광화문 광장에서 단식투쟁을 하고 있던 유가족 유민아빠 김영오씨를 응원하기 위해 함께 단식투쟁을 벌인다. 이 시기 면도를 하지 못해 수염이 많이 길어진 채로 천막에 앉아 있는 문재인의 모습은 지금도 회자된다. 특히 언론은 문재인 의원의 태도를 엄청 비난했는데, 4년 후 누구누구가 단식을 하고 있는 중인데 건강 걱정을 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표리부동한 행태를 보이기도 했다. 때문에 돌려까는 영상이 나왔다. 나중에 밝혀지기로는, 이때 박근혜정부는 언론을 장악하고 조종하여 그의 단식에 대해 '국민적 비난'이 가도록 지시, 비난 보도와 곡필을 강요했다고 한다.



2014년 8월에 대구의 한 취객이 문재인 당시 의원을 죽이러 간다고 경찰에 전화를 걸었다가 검거되는 일이 있었다.# 문재인 의원이 청해진해운 세월호 침몰 사고 유가족들을 위해선 그렇게 열심히 뛰면서 정작 대구 지하철 참사가 일어났을 때에는 신경 쓰지 않았다는 게 그 이유였는데, 사실 문재인 의원은 대구 지하철 참사가 발생했을 때 유족들을 물심양면으로 도왔다. 다만 이를 알리지 않았을 뿐이었다. 13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뒤 그 사고로 부모님을 잃었던 유족 박성찬 씨가 문 의원의 경상남도 양산시 자택을 방문해 문 의원을 만나고 SNS에 남긴 글이 공개되면서 그 사실이 세상에 알려졌다.#

2014년 10월에는 눈가가 퉁퉁 부은 모습으로 국회 국방위원회 국정감사장에 출석해 잠깐 화제가 되기도 했다. 보톡스 및 성형 시술의 부작용이 아니냐는 둥 별의별 소리가 나왔었으나, 고향에서 제초 작업을 하다 벌레에 쏘인 것이 악화되어 저렇게 됐다고.

2014년 11월 7.30 재보궐선거의 참패로 인해 공동대표 김한길, 안철수가 사퇴하고 비대위 체제로 운영되던 새정치민주연합의 제2대 당대표 선거 출마를 선언한다.

 

 

이야깃거리

대한민국 변호사, 정치인이자 제19대 대통령을 역임한 문재인에 대한 트리비아를 다루는 문서. 문재인 문서에서 분리되었다.

성품 이야깃거리

청와대 민정수석 시절 모든 비서관들에게 존칭을 썼다는 유명한 일화도 있고, 종편 등에서 여러 방송을 진행했던 박종진은 문재인의 인성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흠 잡을 부분이 없는 분'이라고 극찬했다. 심지어 연일 문재인 정부를 향해 비판을 쏟아내는 자유한국당 홍준표 대표도 '부드럽고 비교적 진솔한 사람'이라고 평가하며 인간적으로 호감을 느낀다고 말할 정도다.# 국회 국방위원회에서 함께 할동한 정두언 전 새누리당 의원 역시 '좋은 사람'이라는 평을 내렸다. 이처럼 '정치인 문재인'은 몰라도 '인간 문재인'의 인품에는 호감이 간다는 평가가 많다. 절친인 노무현 전 대통령 역시 정치인 노무현은 싫지만 인간 노무현은 좋다는 평가를 받는 것을 생각해보면 유사하다고 볼 수도 있는 대목이다.

19대 대선 JTBC 대선후보 토론 중 노무현 전 대통령 뇌물 수수 운운하던 홍준표 후보를 향해 했던 "이보세요" 한마디가 분노를 참다참다 나오는 가장 격한 수준의 발언이었다고 할 정도니 평소 성격을 짐작할 수 있겠다. 여담이지만 이때 홍준표가 버릇없다고 발언하자 언론이나 네티즌 사이에선 문재인이 홍준표보다 나이가 많다는 사실을 다뤘다. 그리고 이에 홍준표는 출생 신고를 늦게 해서 호적상의 나이만 그렇지 사실은 동갑이라고 해명(?)했다.그리고 그의 "이보세요" 발언과 홍준표의 "버릇없다" 발언은 한동안 이슈였고, 문재인이 당선된 후 '이보세요'와 그 바리에이션들이 표준어로 등재되었다! 임플란트가 많은 것으로도 유명한데, 대통령 비서실 민정수석과 비서실장으로 근무하며 임플란트 시술을 서울대학교 치과병원에서 받던 당시, 바쁜 스케줄에도 항상 수행원들 없이 혼자와서 다른 환자들과 똑같이 기다리다가 치료를 받고 갔다는 것이 서울대 치과병원 내에서 내려오는 유명한 일화라고 한다. 당시 국회의원이나 고위공직자들이 수행원들과 함께 병원에 와서 병원교수들에게 환대받고 특별대우 받는 경우들이 종종 보였다는 소문이 있는데, 문재인만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아 당시 병원사람들이 기억한다고 한다. 일반인들에게는 공포의 시술인 임플란트이지만 당시 문재인은 마취주사 후 시술이 시작되자마자 금세 잠들어버린게 알려질 정도로 극심한 피로가 쌓여있었다고 한다. 주변인들에게 오히려 병원 가는 날에는 치료받는 그 시간에 잠시라도 쉴 수 있어 좋다고 말했던 게 알려질 정도이다.

다만 공직자로서의 절제력이 있는 것과 일상생활에서 모습은 또 별개이다. 인간 문재인은 의외로 화를 낼 때는 확실히 내는 스타일이다. 영부인인 김정숙 여사는 '법무법인 부산' 변호사 시절 사무실에 들르고 시장으로 가던 차에 회사 차 기사가 시장까지 태워준 일이 있었는데 그때 금방 눈치 채고 택시를 타고 시장으로 쫓아 와서 "왜 회사 차를 개인 용무에 사용하냐"며 시장 바닥에서 화를 낸 적이 있다고 회고했다. 또한 문재인이 비서실장이던 시절 아들 문준용이 친구 둘과 함께 노무현 대통령이 선물해 준 홍주를 몰래 뜯어서 마셨을 때에도 드물게 화를 냈다고 한다. 그리고 청와대 비서실장으로 일하던 시절 국회 운영위원회에서 당시 한나라당 의원들과 주고받은 질의응답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질의응답 내용 자체는 크게 특별할 것은 없었으나, 대체로 "사람이 너무 부드러워서 문제다!"라는 소리를 듣던 문재인에게도 나름대로 이런 까칠한 면모가 있었다는 점에서 화제가 되었다. 

그러나 온화한 성품과는 별개로 자타공인 강직한 원칙주의자로도 정평이 나있는데, 유시민 작가가 밝히기를 참여정부 당시 함께 일했던 사람들이 공유하는 유명한 일화로, 문재인의 동기·동창들이 민원을 넣으려 방문하자 돌아앉아 버렸다고 한다(…) 그래서 동창들 사이에서 신망(?)을 많이 잃었다고. 그 외에도, 이미 상술되어 있지만, 민정수석으로 있었을 때 참여정부 공신들 중 몇몇이 대한민국 검찰청에 잡혀 들어갔는데도 문재인은 검찰을 압박해 수사를 무마하는 등의 짓을 하지 않았고, 이로 인하여 참여정부 개국 공신들 중에서는 문재인에게 원한이 있는 사람이 여럿 있다는 이야기가 돌기도 했다. 부산에서 판사로 재직하며 당시 변호사 문재인을 만났던 안철상 대법관은 "당시에는 법관과 변호사가 가끔 식사도 하는 게 자연스럽고 관례였는데 문재인 변호사는 한 번도 같이 식사한 적이 없다"며 "부산 법조계에서 문 변호사는 판사들과 밥 안 먹기로 유명했다"고 회고했다.

그리고 주택청약을 넣으려는 아내에게 "우리처럼 좀 사는 사람들이 그런 걸 우리가 왜 넣느냐"며 눈물 빠지게 호통을 쳐서 아내가 '어디 얼마나 잘 되나 보자'고 이를 갈았다거나, 형이 민정수석이란 사실이 알려져 승진한 남동생에게 전화를 걸어서 "헛물 켜지 말고 하던 대로 해라"고 으름장을 놓았든가, 아들인 문준용 씨의 지인들이 준용 씨의 아버지를 백수(…)나 경비원 등으로 알았다는 일화 등 공사구분이 철저한 사람이란 일화가 많다. 유시민 작가는 "괜히 꾀부리지 말고 60 평생 산대로만 해도 좋은 대통령이 될 것이다"고 평했다.

기본적으로 자기주관이 뚜렷하고 감정표현을 확실히 하는 스타일이라 그런지 정치인이 맞나 싶을 정도로 정치적 요령이 없다. 소위 말하는 꼼수 불문율을 파악하는 능력이 다소 부족하다. 실제로 유시민 작가가 보건복지부 장관이고 문재인 대통령이 청와대 비서실장이었던 시절, 국민연금법이 국회에서 부결되자 유시민 당시 장관이 문재인 당시 비서실장을 찾아가 논의했는데, 노무현 대통령이 부결의 책임을 묻고 보건복지부 장관인 자신을 경질하면 여론이 일어나 다시 국회로 끌어낼 수 있을 것이라는 요지의 말을 문재인에게 전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틀이 지나도록 아무런 소식이 없어 알아보니, 문재인이 유시민 당시 장관의 숨은 뜻을 까맣게 모르고 그저 장관이 큰 책임감을 느껴 으레 하는 말인 줄 착각하고(…) 노 대통령에게 보고하지 않아 그랬던 것이라고 한다.

인기

  관련 문서: 친문

단순히 정치적 지지를 넘어선 문재인 개인에 대한 '인기'가 많다. 그리고 이러한 대중적 인기를 바탕으로 대통령 취임 이후 열성적인 지지를 받으며, 여느 정치인들의 팬클럽을 뛰어넘는 강력하고 탄탄한 '팬덤'을 자랑한다. 리얼미터 조사에 따르면 2019년 9월 현재 문재인의 국정지지율은 긍정 47.8%, 부정 48.3%이다.
http://www.realmeter.net/리얼미터-9월-1주차-주중동향-文-대통령-긍정-47-8-부정-48-3

'문재인 팬덤'의 가장 큰 특징은 조직되지 않은 시민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노사모, 박사모와 같은 조직과는 달리 이 지지층들은 단일하고 가시적인 조직 체계의 성격은 상당히 희미한 편이다. 오늘의 유머나 루리웹 또는 클리앙 같이 지지층들이 주로 모이는 커뮤니티들이 있긴 하지만 이곳들이 친문 지지층의 전체 여론을 통제하거나 주도하는 '지휘부'의 역할은 하지 못한다. 일부 과도한 극성팬덤이 형성되어 커뮤니티 상에서 반감을 불러모으기도 한다. 자세한 내용은 문빠 참조.

박근혜 전 대통령의 열성 지지층을 '콘크리트 지지층'이라고 불렸는데, 문 대통령의 열성적인 지지자들이 보내는 지지 역시 그에 못지 않는 굳건함을 자랑하고 있다. 이를 증명하듯 취임 이후 1년 동안 지지율 50 ~ 70% 대를 유지했다. 한국갤럽 조사를 보면 취임 1년차 대통령 국정 지지도 조사가 기존 1위였던 김대중 전 대통령을 23%p 차이로 추월해서 1위를 차지했다. 이러한 존재감 때문에 정치권 한 관계자는 “개인으로서 정당에 가까운 상징성을 가졌던 YS와 DJ, 또는 JP 수준의 정치적 입지로 격상되는 것 같다”고 한다.# 여론조사 전문기관 리얼미터 권순정 조사실장은 김어준의 파파이스에서 이 추세로 간다면 퇴임 지지율이 50퍼는 넘을 것이라고 예측했다. 한국갤럽 조사 기준으로 문민정부 이후 어떤 정권이든 퇴임 직전 지지율은 50%는 고사하고 30%를 넘는 정부도 없다.

특히 학생 ~ 청년층 지지율이 높았다. 지지율이 조정세에 접어들었지만 19세~30대의 지지율이 보통 50~60%대를 유지하며 1위~2위를 차지하는 경우가 흔하다. 그리고 참여정부 시절 청년 시기를 보낸 40대의 지지율이 유독 높은 편이다. 18대 대선 당시 문재인이 가장 높은 득표율을 보였던 계층이 20대 여성(69%)이었고, 20대 총선 지원 유세 사진과 영상들만 봐도 같이 사진 찍으려는 젊은 사람들이 줄을 서 있다. 20대 여성 (69%) > 30대 남성 (68%) > 30대 여성 (65%) > 20대 남성 (62%) 순으로 지지가 높았다. 19대 대선에서도 20대 (47.6%), 30대 (56.9%), 40대 (52.4%)의 지지율이 과반에 육박했다. 2017년 포항 지진이 발생하여 수능이 연기되어 치러진 이후 포항여고를 방문했을 때도 학생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기도 했다.

여권 인사라도 문재인을 비난하는 언행을 보이면 비난 받는 일도 있다. 한 예로 2016년 11월에 이재명 성남시장이 자신의 페이스북에 달린 답글들에 일일이 '좋아요'를 누르다 문재인 전 대표를 비방하고 인신공격하는 악플들에게도 좋아요를 눌렀다가(…) 융단 폭격을 맞은 일이 일었다. 

 


문재인 대통령의 인기에 힘입어 소위 '이니굿즈'라고 불리는 문재인과 관련된 제품 속속 등장하고 있다.#,## 이니굿즈를 분류하면 대략 다음과 같다.

이 중에서도 가장 인기가 높은 것은 비매품이고 수량도 적어서 구하기가 힘든 대통령 기념시계와 같은 기념품이다. 어찌나 수요가 많은지, '차라리 국가에서 공식적으로 판매해서 물량도 늘리고 세수도 늘리는 쪽으로 하자'라는 주장까지 나오고 있다.청와대에서 국민의 성원을(?) 아는지 2018 평창 동계올림픽 홍보를 위해 개최한 공모전 이벤트에서 상품으로 대통령 시계와 문 대통령과의 오찬을 내걸기도 했다. 그리고 문재인 대통령 취임 기념우표와 시트, 기념우표첩이 인기를 끌면서 순식간에 동나고, 역대 대통령 처음으로 추가 발행되는 일도 있었다.

강력한 인기에 힘입어 완판남이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다. '완판남' 등극 100일차 文대통령…안경, 커피, 잡지까지 완판 사례로, 대통령 취임 이전에는 문재인 당시 후보가 표지를 장식한 타임지 아시아판이 (번역도 안되었는데!) 인터넷 서점 사이트에서 배포 즉시 품절되면서 지지자들 사이에서 해당 타임지를 구하기 위한 경쟁이 벌어지는 일도 있었다. 그래서 소장용 - 구독용 2개산 인증샷이 올라오면 상도덕 지키라는 불평이 나오기도 했다. 이 잡지는 한국에서만 10만 부 이상 팔렸다. 그리고 5.18 광주 민주화운동 기념식 때 문재인 대통령이 신은 낡은 구두로 유명해진 장애인 수제화 브랜드 ‘아지오(AGIO)’의 경우 밀려온 구매 요청으로 2013년 9월 회사가 문을 닫은 지 4년 5개월 만에 새출발했다. 비슷하게 사례로 문 대통령이 취임 후 첫 휴식에서 기자들과 등산할 때 입은 이미 단종된 블랙야크의 오렌지색 'B가디언' 재킷이 구매문의가 이어지면서 블랙야크가 고심 끝에 재출시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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